가톨릭 평신도로 대구서 사랑과 봉사의 삶… 스코틀랜드 할머니 수산나 메리 영거 씨
“20대에 운명처럼 다가온 한국… 영국은 친정, 대구는 시댁이죠”
《 “어서 오이소.” 대구 사투리다. 그런데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푸른 눈의 할머니다. 지난달 29일 찾은 대구 수성구 황금동 가톨릭푸름터(옛 가톨릭여자기술원) 초대 원장이자 고문인 수산나 메리 영거 씨(77).
영국 스코틀랜드 출신이지만 이제 ‘대구 할머니’가 됐다. 그는 1959년 화물선을 타고 5주간의 항해 끝에 한국 땅을 밟았다. 옥스퍼드대에서 철학과 경제학을 전공한 23세의 여성.
그의 호칭은 세월 따라 바뀌었다. 처음 ‘언니’ ‘누나’에서 ‘원장님’, 다시 한국 이름 ‘양 수산나 할머니’로. 》
○ “하느님 때문에 시집 안 갔지.”
수녀도 아니면서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아왔다. 영거 씨는 옥실리움(auxilium·사도직 협조자)의 일원이다. 가톨릭에서 사도직 협조자는 특정 교구에 소속돼 독신으로 살며 주교를 도와 교회와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사람이다.
명문가 출신인 그의 아버지는 영국 외교차관을 지낸 노동당 관료이자 마르크스주의자였다. 집에서 ‘수지’로 불리던 그는 고교 때 성경을 접한 뒤 가톨릭 신자가 됐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해외에서 봉사활동을 하며 완전히 그리스도에게만 속할 수 있는 곳을 찾았어요. 수녀가 되고 싶어 수녀회 문도 두드렸지만 해외 봉사할 기회를 주는 곳은 없더군요.”
그는 소녀처럼 웃으며 러브스토리도 공개했다. 자신에게 맞는 수녀회를 찾지 못하자 프랑스인 의사와 약혼해 아프리카 카메룬으로 가기로 약속한 것. 하지만 그 무렵 먼 나라 한국이 운명처럼 다가왔다.
“한국 유학생의 특강을 들었어요. 그가 전하는 한국의 가톨릭 역사는 슬프면서도 아름다웠어요. 가난한 나라의 작은 교회, 그러나 믿음을 위해 순교를 마다하지 않는 모습은 예수 그리스도의 초기 교회를 연상시켰어요.”
그는 당시 대구대교구장인 서정길 대주교의 도움으로 마리아 하이센베르거(하 마리아·한국SOS어린이마을 설립자)와 한국에 왔다.
○ “김수환 추기경은 가장 좋아하는 사제”
영거 씨는 대구, 아니 가난한 한국에서 절대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용기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청소년들을 도우면서 1962년에는 서 대주교의 권유로 불우한 여성들에게 양재와 미용 등을 가르치는 가톨릭여자기술원을 설립했다.
“‘우리 대구’ 엉망이었어요. 길에 6·25 때 생긴 포탄 구멍 그대로 있었어요. 구두 닦는 아이들을 씻기기 위해 옷을 벗기면 이가 후드득 떨어졌죠.”
서 대주교의 소개로 프랑스에서 만난 신부 김수환과의 인연도 계속됐다.
“김 추기경은 ‘my favorite priest(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제)’였어요. 대구교구에 있다가 마산교구장이 됐는데 기술원을 찾아 많은 도움을 줬어요. 그분은 가난한 사람과 항상 가까이 있었고, 신자 아닌 분들도 사랑했어요. 이런 말은 뭐 하지만, 김 추기경은 ‘직통’으로 하느님께 가셨을 겁니다.(웃음)”
이제 청소년을 위한 공간이 된 푸름터는 그의 분신이다. “요즘 헤어디자이너 과정을 모집하고 있어요. 이곳에서 청소년들이 잃어버린 꿈을 찾기 바랍니다.”
1973년부터 여성 사도직 협조자 교육을 위해 프랑스 루르드로 간 그는 매년 한국을 오가며 대구와의 인연을 이어갔다. 2004년 은퇴한 뒤 그의 선택은 당연히 한국 귀국이었다. 2011년 대구 명예시민이 됐다.
“사람들에게 이렇게 얘기해요. 태어난 영국은 친정, 대구는 시댁, 프랑스는 연금이 나오니까 직장이죠. 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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