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헤드윅과 닮았다… 아니, 더 강렬하다

모노드라마 ‘나는 나의 아내다’ ★★★★

2시간 동안 단 한 명의 배우가 35개 배역을 소화하는 연극 ‘나는 나의 아내다’는 동성애를 다룬 공연 중에 가장 절제된 무대연출로 시선을 사로잡는다. 나치즘과 공산주의라는 20세기 최대의 전체주의 시대를 여장남자로 살아낸 실존인물 샤로테 폰 마르스도르프(남명렬 분)는 에디슨 축음기 실린더 레코드와 19세기 말고가구를 수집하는 고품격 취미를 지녔다. 두산아트센터 제공

냉전시대 동독 출신 동성애자의 기막힌 삶을 자전적으로 풀어낸 작품은? 브로드웨이 뮤지컬 ‘헤드윅’(1998년 초연)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헤드윅은 동베를린 출신의 동성애자로 미군과 결혼하기 위해 트랜스젠더 수술까지 받는다. 하지만 실패한 뒤 미국에서 록 밴드를 결성해 활동하다가 사랑하는 연하남에게 철저히 배신당하는 비련의 인물이다.

여기에 그 닮은꼴 연극이 있다. 나치 치하와 동독 사회주의 정권 치하 동베를린에서 여장남자로 살아온 샤로테 폰 마르스도르프(1928∼2002)의 기막힌 삶을 그린 ‘나는 나의 아내다’(더그 라이트 작, 강량원 연출)이다.

‘헤드윅’은 실존 인물을 모델로 했지만 상당부분은 가공의 이야기다. 반면 ‘나는…’은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하지만 샤로테의 삶은 헤드윅을 능가할 만큼 극적이다. 그는 자신과 어머니를 핍박하는 나치당원 아버지의 폭력에 맞서다 총으로 그를 살해했다. 이 때문에 소년원에 수감돼 있다가 러시아군의 폭격으로 불바다가 된 소년원을 탈옥했다.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공산주의 정권 아래서 여장남자로 살면서 ‘그륀더차이트 박물관’이란 사설박물관을 30여 년간 운영했다.

그륀더차이트는 독일에서 ‘명랑한 90년대’라고 불리는 1890∼1900년대를 지칭하는 용어다. 샤로테는 그 시대의 가구를 집중 수집해 자신의 집을 가구박물관으로 개조했다. 이 박물관 지하는 동독 시절 불법화된 동성애자들의 비밀 아지트이기도 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그는 “냉전이 낳은 가장 독특하고 가장 흥미로운 사람”으로 평가받으면서 통일독일의 훈장까지 받게 된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가 동독 비밀경찰 슈타지의 정보원이었다는 기록이 공개되면서 이야기는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연극은 이런 스토리를 화려한 글램 록 형식이 아니라 지극히 절제된 모노톤 형식으로 풀어놓는다. 샤로테의 의상은 수녀를 연상시키는 검은 원피스에 진주목걸이 하나 두른 것이 전부이고, 샤로테가 남자보다 더 사랑한 가구들은 정교한 미니어처로 제시된다. 무엇보다 샤로테가 10대 소년부터 70대 노인으로 숨을 거둘 때까지 60년의 세월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 35명을 단 한 명의 배우가 소화하는 모노드라마 형식을 채택했다.

이는 극중 주요 인물로도 등장하는 동성애자 극작가인 더그 라이트의 깊은 예술적 고뇌의 산물이다. 이 작품은 샤로테가 인터뷰한 지 10년이 지나 숨을 거둔 뒤에 비로소 발표됐다. 거기엔 기이한 삶을 산 희대의 광대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위엄을 지키려 몸부림쳤던 한 인간에 대한 경의가 담겼다. 미국 공연계는 만장일치에 가까운 지지를 보냈다. 2004년 퓰리처상, 토니상, 드라마데스크상, 오비상의 최고작품상이 모두 이 연극에 돌아갔다.

한 명의 배우가 쉬지 않고 떠들고 연기해야 하는 모노드라마는 보통 공연시간이 1시간 안팎이다. 이 작품은 2시간을 꽉 채운다. 배우로서 큰 도전이 아닐 수 없다. 한국어 공연에선 50대 배우 남명렬과 30대 배우 지현준이 그 도전에 나섰다. 지난주 먼저 무대에 오른 남명렬은 뛰어난 화술을 앞세워 절제된 연기로 이야기 전달에 주력했다. 다음 주부터 무대에 오를 지현준은 강렬한 비주얼을 앞세운 능란한 연기 변신이 장기다. 남명렬에 이어 지현준의 공연을 비교해 봐도 아깝지 않을 매력적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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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일까지 서울 연지동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 111. 1만∼3만 원. 02-708-5001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