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8월 9일 당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를 맡고 있던 장클로드 트리셰는 손자들과 휴가를 보내기 위해 고향인 프랑스 생말로에 내려와 있었다. 오랜만에 휴식을 누리려던 그의 계획은 오전 7시 반 독일 프랑크푸르트 ECB 본부에서 걸려온 전화로 산산이 깨져버렸다. ‘(프랑스의 대표 은행인) BNP파리바가 미국 부동산담보대출(모기지) 증권에 주로 투자해온 펀드의 자금 인출을 중단했다. 손실이 커 고객들에게 내줄 유동성이 없다’는 보고였다.
3시간 뒤 ECB의 정책 담당자들이 모두 콘퍼런스콜에 참여했다. 트리셰는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자금을 긴급 지원하는 일밖에 없다”고 결정했다. 같은 날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워싱턴에서 헨리 폴슨 재무장관과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고, 머빈 킹 영국은행 총재는 크리켓 게임을 보기 위해 이동하고 있었다.
워싱턴포스트 경제 칼럼니스트인 닐 어윈은 신간 ‘연금술사들(The Alchemists)’에서 글로벌 금융위기의 시발점이었던 이날을 이같이 묘사했다. 그는 위기의 시작이 2008년 8월 리먼브러더스 파산이 아니라 1년 전인 이날이었다고 적었다. 하지만 글로벌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3대 중앙은행 수장들조차 당시 글로벌 경제가 기나긴 침체의 늪에 빠질지 예상하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저자는 미국 FRB 의장, ECB 총재, 영국은행 총재 ‘빅3’를 연금술사에 비유했다. ‘납을 금으로 바꾼다’는 연금술사처럼 세계 경제에 미치는 그들의 파워가 막강함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다.
닐 어윈은 이 책에서 과거 물가상승(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것이 중앙은행의 최대 과제였다면 최근 몇 년간은 경제위기를 막는 ‘최후의 보루’로 역할이 바뀌어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독립성이 생명인 중앙은행의 정체성도 흔들려 정치권과의 거래가 점점 늘어 정치적인 기구로 변모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킹 총재가 2010년 선거에서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의 승리를 뒤에서 지원한 사실을 사례로 들었다. 이후 킹 총재는 기준금리를 낮게 유지하는 대신 캐머런 총리가 재정긴축에 나설 것을 요구하는 ‘거래’를 했다고 전했다.
일반적으로 중앙은행의 이런 행태에 대해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지만 저자는 달랐다. 그는 최근 몇 년간의 행태를 옹호하는 쪽에 섰다. 최후의 보루인 만큼 그들의 결정을 인정해야 한다는 논리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서평에서 ‘여전히 미국 경제는 (미래를) 종잡을 수 없고 영국은 기진맥진해 있으며 유럽은 아직까지는 요절나지 않았다. 연금술사들은 결국에는 납을 금으로 바꾸지 못했다’고 꼬집었다. 그럼에도 이 책은 현재 세계의 가장 큰 이슈인 글로벌 침체에 맞서는 주요국 중앙은행의 속살을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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