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교 교과과정 가운데 ‘삼국(三國)’이라 불리던 교과목이 있었다. 국어, 국사, 국민윤리 세 과목을 뜻했다.
3공화국 시절 확립된 ‘삼국’은 5공 시절을 거치며 군부독재정권의 국가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과목이라는 비판에 직면했다. 이 중 국민윤리에 대한 비판이 가장 거셌지만 그래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최소한의 자질을 교육하기 위해 필요하다는 시각이 우세했다.
그러나 2000년대 들면서 국어를 제외한 다른 두 과목은 필수과목에서 선택과목으로 전락했다. 국민윤리는 ‘사회와 윤리’로 아예 이름이 바뀌었고, 국사도 세계사와 통합해 그냥 역사로 가르쳐야 한다는 목소리까지 나왔다.
‘삼국’의 몰락은 얼핏 탈민족주의라는 시대적 조류에 부합하는 듯하다. 하지만 그로 인한 후유증은 이미 심각한 상황이다. 2000년대 이후 중고교를 다닌 세대는 공동체에 대한 전 세대의 기억과 정보를 공유하지 못한다. TV에선 역사적 사실을 도외시하는 ‘엉터리 사극’이 범람하고, 인터넷에선 5·18민주화운동을 빨갱이들의 소행이라거나 순국선열을 테러리스트라고 폄훼하는 글이 횡행한다. 현실에선 선택과목에 불과한 근현대사 교과서를 둘러싼 이념투쟁이 계속되고 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대(UCLA) 역사학 교수 3명이 저술한 이 책은 이런 현상, 특히 국사 실종 현상의 배후를 풍성하면서도 명쾌하게 설명해준다. 각각 문화사, 정치사, 과학사 분야를 대표하는 여성학자인 이들은 기존 서구역사에 대해 ‘죽은 유럽 백인남자들(DWEM)의 업적을 찬양하기 위한 정치적 목적에 오염된 서사’라는 비판이 대두하고, 이로 인해 ‘과연 역사를 통한 진실 추구가 가능한가’라는 회의가 만연하게 된 이유를 꼼꼼히 분석한다. 거기에는 ‘과연 현대사회에서 다양한 계층과 집단의 이익을 초월하는 보편적 국사 서술이 가능한가’라는 문제의식이 담겨 있다.
저자들은 오늘날의 역사학은 1960년대 이전까지 누리던 세 가지 지적 절대주의의 상실을 체험했다고 말한다.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과학을 영웅시하는 영웅적 과학 모델 △인간의 역사는 진보의 역사이며 그에 맞춘 역사발전의 법칙을 발견할 수 있다는 진보에 대한 신념 △국가 건설과 발전에 매진하는 것을 근대적 정체성의 원천으로 삼은 민족주의적 감수성.
하지만 두 차례 세계대전이 안겨준 과학에 대한 환멸, 민주주의 확산을 통해 드러난 근대의 위선과 만행,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자행된 폭력과 억압은 이들 지적 절대주의를 무너뜨렸다. 철학적 회의주의와 상대주의로 무장하고 역사를 신화나 문학 같은 허구적 서사로 간주하는 포스트모더니즘의 득세는 이를 더욱 가속화했다.
그 결과가 지금 한국에서 극단적 형태로 벌어지는 현상을 초래했다. 한편으론 공동체가 공통으로 기억하는 역사의 실종이며, 다른 한편으론 모두가 자신들 입맛에 맞게 역사를 멋대로 재구성하는 역사의 만연이다.
이에 대한 저자들의 대응은 진보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역사의 해체’도 아니고 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과거로의 회귀’도 아니다. 절대 진리는 아니더라도 현실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진리를 추구하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는 ‘실용적 리얼리즘’이다. 또한 민주주의와 다원주의적 가치를 반영하면서도 공동체 연대를 위해 국사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1994년 포스트모더니즘 득세에 대한 반론의 성격이 강하다는 한계는 있지만 최근 해석보다 사실로 돌아가자는 역사학계의 경험주의적 전회(empirical turning)를 선구한 책이다. 원제 ‘Telling the Truth about History’.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