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앞에 선 이것은 뭐지?/날 가리키는 검은 형체/빠르게 돌아 달리기 시작한다.’(‘블랙 사바스’ 중)
저음부가 강조된 묵직한 전자기타 소리는 좀비의 움직임처럼 축축 늘어지다 문득문득 민첩하게 일어서 공격한다. 우울한 보컬과 음산한 가사가 뿜는 염세적 색채는 해질녘 들판에 선 알 수 없는 그림자 같다.
1968년, 영국 애스턴의 스무 살짜리 젊은이 넷은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됐다. 느긋한 블루스 음악의 형식을 증폭하고 변형해 헤비메탈을 만들어 낸 것이다. 팀명은 블랙사바스(Black Sabbath·검은 안식일). 이 새로운 음악은 1970년대 세계의 젊은이들을 열광시켰다. ‘블랙 사바스’ ‘파라노이드’ ‘마스터 오브 리얼리티’ 같은 초기작은 헤비메탈의 교과서로 불렸다. 1980년대에는 음울한 발라드 ‘시스 곤’이 국내에서도 큰 인기를 누렸다.
블랙사바스가 10일 19번째 정규 앨범 ‘13’을 전 세계 동시 발매한다. 블랙사바스 음악의 정수라 불린 보컬리스트 오지 오즈번(65)이 탈퇴 후 35년 만에 다른 원년 멤버들(토니 아이오미·기타·65, 기저 버틀러·베이스·64)과 재결합해 만든 정규 앨범이다. 드러머 빌 워드(65)가 계약 문제로 합류하지 못한 대신 록과 랩을 결합해 들려준 밴드 ‘레이지 어겐스트 더 머신’과 그룹 오디오슬레이브 출신의 젊은 피 브래드 윌크(45)가 드럼 앞에 앉았다. 아이오미는 림프종을 이겨 내고 기타를 다시 잡았다.
‘13’에서 블랙사바스는 1970년대 초기 스타일로 돌아갔다. 7∼8분짜리 대곡들을 만들어 냈다. ‘아이언 맨’, ‘플래닛 캐러밴’, ‘홀 인 더 스카이’ 같은 초기 명곡들이 떠오른다. 슬레이어, 메탈리카, 린킨 파크의 음악을 책임진 프로듀서 릭 루빈이 제작한 음향은 21세기 록 사운드에 뒤지지 않는다.
해외 평단에서는 벌써 ‘감동의 귀환’이라는 극찬을 내놓고 있다. 영화로 치면 HD 화질에 3D로 리메이크된 고전이 동시대 고전 반열에 다시 오르는 형국이다. 미국 음악 리뷰 사이트 올뮤직닷컴은 “메탈 팬들이 필히 들어야 할 앨범”이라며 별 4개 반(만점은 5개)을 줬다.
하드록과 헤비메탈에 정통한 국내 평론가들도 이례적인 호평을 쏟아 냈다. 송명하 월간 파라노이드 편집장은 “그동안 원로 밴드들의 재결합은 기존 팬의 추억에 호소하며 예전 인기를 갉아먹는다는 느낌이 들 때가 많았다. 블랙사바스의 신작은 자신들의 스타일을 유지하면서 상당 부분 전성기를 압도하는 무게와 힘을 보여 주고 있다”고 했다. 그는 “8곡 가운데 5곡이 7분이 넘는 러닝타임을 가지고 있다는 점도 휴대전화의 통화대기음같이 배경음악으로 전락해 버린 최근의 음악 창작과 소비 행태에 던지는 무언의 메시지와 같다”고 덧붙였다.
서정민갑 대중음악평론가는 “자신들이 오랫동안 밀고 왔던 바로 그 사운드의 원형으로 돌아왔다. 시대에 영합하지 않은 뚝심, 그리고 그 뚝심만큼 단단한 사운드의 밀도와 아우라가 확인시켜 주는 것은 바로 고전의 현재적 가치”라고 했다.
한명륜 월간 스튜디오24 피처에디터는 “‘갓 이스 데드?’의 음산한 아르페지오, ‘에이지 오브 리즌’의 극적이고도 긴박한 기타 솔로, 곡 전반부를 덮은 입체적이고도 두터운 베이스와 드럼의 화합물, 낮아진 음역이 갖는 위치에너지를 충분히 살린 오즈번의 보컬 라인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며 “(영화) ‘터미네이터’식의 시제(時制)를 빌리자면 이 모든 것은 이미 존재했던 헤비메탈의 ‘가능한 모든 내일’이었다. 그 내일이 블랙사바스임을 입증한다”고 했다.
블랙사바스는 옛 히트곡 ‘아이언 맨’(1970년)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미래로 떠나 인류를 구원한 뒤 강철로 굳어 버렸지만 사람들의 조소를 이겨 내고 사자후를 뿜으며 부활하는 무쇠인간을 그렸다. 영화 ‘아이언 맨’(2008년)에도 수록됐던 이 곡은 복선이었을까.
‘그는 강철로 변해 버렸어/거대한 자기장 속에서/시간여행을 하다가… 이제 때가 왔어/아이언 맨이 위세(威勢)를 떨칠 때가.’(‘아이언 맨’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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