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형렬 시인(59)이 최근 펴낸 아홉 번째 시집 ‘지구를 이승이라 불러줄까’(문학동네·사진)를 펴면 이런 짧은 글귀가 눈에 띈다. 여운이 남는 모호한 문장. 여기서 ‘나’는 고 시인이고 ‘너’는 7년 전 세상을 뜬 박영근 시인(1958∼2006)이다.
박 시인은 1980년대 노동시 운동을 이끌었고 노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의 원작시 ‘백제’를 쓴 문인. 고 시인은 네 살 아래 박 시인의 시가 좋아 “한번 만나자”고 먼저 청했단다. “1981년 (서울) 피맛골 막걸리집에서 박 시인을 처음 만났는데 물들인 군복을 입은 그의 눈에서 빛이 났어요. 대뜸 ‘왜 나를 만나자고 했나’라고 묻기에 솔직히 털어놨죠. ‘내가 너를 좋아한다’고.”
이후로 박 시인은 얼큰하게 취하면 새벽에 고 시인에게 전화를 걸어 괴롭혔단다. 박 시인은 7년 전 결핵성 뇌수막염과 패혈증으로 세상을 등졌지만 문우는 아직 그를 잊지 못하고 있다.
‘너에게 내 슬픔을 주마, 나의 슬픔을 가져가거라/문청(文靑)처럼 너의 슬픔을 건축하리라… 너의 이름은 이 추운 겨울, 어딜 혼자 걸어가고 있니/그 누구의 등도 따라가지 않으면서/이쯤 세월이 지나 우리의 이름은/하나의 시어(詩語)가 되었다….’(시 ‘죽음의 부쳐진 자-박영근 시인에게’에서)
고 시인은 5년 전 서울을 떠나 경기 양평군 지평리에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전원생활을 시작한 시인들은 대개 자연을 노래한 시편을 많이 선보이지만 그는 이번 시집에서 삭막한 도시의 어둠, 죽음, 불안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작품을 다수 수록했다. “전원에 와서 도시와 거리를 두니 도시가 더 뚜렷하게 보이더군요. 도시에서 소외되거나 버려진 존재를 찾아가고 싶은 마음을 시집에 담았습니다.”
‘바람이 불면 빌딩들이 운다/빌딩 벽을 타고 오른 사각의 도면들이 전율한다/사변과 모서리를 지키고 껴안기 위해//그 아래 황사가 유사(類似) 태평천하처럼 떠 있다/먼지가 된 모래들이 깨어지는 소리가 바각댄다… 알아들을 수 없는 울음소리가/도시에서, 아니 지구에서, 땅속에서, 철골에서/먼 기억으로부터 울리고 있다.’(시 ‘알아들을 수 없는 울음소리가’에서)
볼일이 있어 서울에 올 때면 빌딩이, 지하철이, 꽉 막힌 도로가 내는 도시의 절규를 듣곤 한다는 시인. 이런 비명을 듣지 못하는 도시인은 어느새 난청 환자가 된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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