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재현 기자의 망연자실]60분간 웃다가… 막판 20분 깊은 침묵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11일 03시 00분


노다 히데키 연극 ‘The Bee’ ★★★★☆

여섯 살 아들의 생일선물을 사들고 퇴근하던 평범한 회사원 이도(캐서린 헌터·가운데)는 자신의 집 앞에 잔뜩 포진한 경찰과 기자진을 보고 깜짝 놀란다. 집 앞에 설치된 폴리스 라인은 어느새 방송사의 마이크로 바뀌고 이도는 어리둥절한 상태로 TV 인터뷰에 응하다가 자신의 아내와 아들이 흉악범의 인질이 됐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 명동예술극장 제공
여섯 살 아들의 생일선물을 사들고 퇴근하던 평범한 회사원 이도(캐서린 헌터·가운데)는 자신의 집 앞에 잔뜩 포진한 경찰과 기자진을 보고 깜짝 놀란다. 집 앞에 설치된 폴리스 라인은 어느새 방송사의 마이크로 바뀌고 이도는 어리둥절한 상태로 TV 인터뷰에 응하다가 자신의 아내와 아들이 흉악범의 인질이 됐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 명동예술극장 제공
숨 막히는 명연기? 없었다. 스펙터클한 무대미학? 없었다. 충격적인 장면? 없었다.

그런데 눈길을 뗄 수 없었다. 전체 80분 공연시간 중 60분가량은 시냇물처럼 웃음이 졸졸 흐르다가 막판 20분 끊임없이 반복되는 장면을 통해 관객을 우물처럼 깊은 침묵으로 몰아넣었다. 7일과 8일 딱 3회 공연을 펼친 노다 히데키의 연극 ‘The Bee(꿀벌)’는 스펙터클한 영상미학이 난무하는 시대 연극의 갈 길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보여줬다.

연극은 아내와 여섯 살 아들을 탈옥수의 인질로 붙잡힌 평범한 회사원이 인질범과의 협상을 위해 우발적으로 인질범의 아내와 아들을 인질로 잡으면서 벌어지는 상황을 다뤘다. 애니메이션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원작자 쓰쓰이 야스타카의 소설 ‘이판사판 인질극’(1975년)이 원작이다.

영화나 드라마라면 이를 매우 사실적으로 그리면서 팽팽한 긴장감을 부여할 것이다. 하지만 연극은 관객에게 이런 몰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1970년대 일본을 배경으로 했지만 인질범 아내 역으로 직접 출연한 노다를 제외한 3명의 배우는 모두 서양배우다. 대사는 모두 영어다. 반대로 배경음악으로 팝송이 흐르는데 모두 일본어로 번역된 팝송이다.

할리우드 유명배우 스티브 매퀸을 흉내 내는 일본 형사 역을 맡은 서양 배우를 보면 실소가 터질 수밖에 없다. 남자 주인공 이도(캐서린 헌터)와 인질범의 아내(노다 히데키)는 남녀의 성(性)까지 바꿨다. 남자 흉내 내는 여배우와 여자 흉내 내는 남배우를 보면서 극적 긴장감을 유지하기란 힘든 법이다.

이런 ‘낯설게 하기’는 너무도 기발한 무대와 소품 활용에서도 빛을 발한다. L자 형태의 접은 종이로 만들어진 무대는 공연 도중 접히고 찢기고 뜯기고 메워진다. 고무줄은 폴리스 라인이 되기도 하고 마이크가 되기도 한다. 연필은 젓가락도 되고 손가락도 된다.

이런 연극적 장치들은 폭력을 비판한다면서 폭력을 모방하고 미화하는 무수한 영상작품들의 자가당착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한 것이다.

회사원 이도는 자신의 가족을 구하기 위해 흉악범 오고로를 모방한다. 그 둘은 아내와 그날 생일을 맞은 여섯 살 난 아들이 있다는 공통점을 제외하곤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하지만 서로가 서로의 폭력을 경쟁적으로 모방하면서 끔찍할 정도로 닮아간다. 폭력에 중독된 이도는 말한다. “살아오는 동안 그 어느 때보다도 내가 삶을 통제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이게, 이 모습이 진정한 나라는 걸 알았을 때, 이제부턴 내 본모습을 지키는 게 내 의무가 되었어. 살아 있는 기분이야.”

그리고 이도와 오고로 간에는 서로 상대를 겁주기 위한 치킨게임이 펼쳐진다. 폭력을 제압하기 위한 폭력은 어느 순간부터 가학적 쾌감으로 고조되다 결국 끔찍한 자멸로 종결된다. 생존을 위해 침을 쏘지만 그로 인해 죽음을 맞는 꿀벌처럼.

마지막 20분 동안 다람쥐 쳇바퀴 돌리듯 되풀이되는 배우들의 우스꽝스러운 연기 앞에 관객의 입가에 머물던 웃음은 사라졌다. 그리고 윙윙대는 벌떼의 날갯짓 소리에 무대는 무너지고 객석은 긴 침묵에 빠졌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The Bee#노다 히데키#시대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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