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음악극 역사의 두 거장인 바그너와 베르디의 탄생 200주년입니다. 독일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항복한 5월, 유럽에서는 바그너의 신화적 세계가 히틀러의 인종주의에 끼친 영향에 대해서도 크고 작은 재조명이 이루어졌습니다.
바그너와 히틀러를 논하다 보면 또 다른 인물과 마주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이에른 왕국의 왕이자 바그너의 후원자였던 루트비히 2세(1845∼1886)입니다.
바그너의 청년기에 독일은 여러 왕국과 공국으로 분열된 상태였고 이 중 바이에른은 프로이센 다음으로 큰 나라였습니다. 이 나라의 왕세자는 열다섯 살 때 중세의 기사와 백조가 등장하는 바그너의 오페라 ‘로엔그린’을 보고 매료됐습니다. 3년 뒤 왕위에 올라 루트비히 2세가 된 그는 유럽을 전전하던 바그너를 초청해 전폭적인 후원을 시작합니다. 바그너가 자신의 작품만을 상연하기 위해 1876년 지은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도 막대한 왕의 자금이 투입됐습니다.
1871년 독일이 통일되면서 정치적 실권이 크게 줄어들자 루트비히 2세의 환상세계는 오히려 커져 갔고 그는 중세를 연상시키는 큰 성을 잇달아 지었습니다. 1869년 남부 퓌센에 짓기 시작한 노이슈반슈타인 성은 백조를 비롯해 바그너의 음악극 장면들을 연상시키는 장식물로 치장했습니다. 디즈니랜드 ‘백설공주성’의 모델이 된 성입니다. 그러나 이런 건축사업들로 국고를 탕진하게 됐습니다. 결국 장관들은 ‘왕이 미쳤다’며 그를 감금했고, 이튿날 왕은 호수에서 의문의 익사체로 발견됐습니다.
그는 절망에 빠져 자살한 것일까요? 호수는 사람의 키보다 훨씬 얕았습니다. 그러나 왕이 평소 “나는 후대에 영원한 미스터리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는 걸 보면 자살설에도 무게가 실립니다.
그의 죽음이 광기에 의한 것이고, 그 광기가 중세의 환상을 강조한 바그너의 음악극에서 영향을 받았다면, 바그너는 독일 역사상 두 지배자의 광기에 책임이 있는 셈입니다. 바그너의 음악극은 게르만 민족의 설화와 영웅담을 주요한 재료로 다뤘고, 히틀러는 그의 음악을 찬미하며 ‘독일지상주의’ 이념을 굳혔습니다. 물론 차이는 있습니다. 바그너도 히틀러처럼 유대인을 경멸했지만 그들이 유대 문화를 포기하고 독일 사회에 흡수돼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 유대인을 격리하거나 박멸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6월 13일은 127년 전 루트비히 2세가 호수에서 의문의 익사체로 발견된 바로 그 날입니다. ‘로엔그린’ 일부를 비롯한 바그너의 신화적 작품들은 다음 링크 주소와 QR코드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http://blog.daum.net/classicgam/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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