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심심풀이 땅콩’ 아침드라마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6월 21일 03시 00분


[구가인 기자의 애 재우고 테레비]

아침드라마도 대세는 ‘연상녀-연하남’ 커플이다. MBC ‘잘났어 정말’의 하희라(왼쪽)와 심형탁. MBC 제공
아침드라마도 대세는 ‘연상녀-연하남’ 커플이다. MBC ‘잘났어 정말’의 하희라(왼쪽)와 심형탁. MBC 제공
1년 전 출산휴가 시절, 내 하루는 아침드라마와 함께 시작됐다. 당시 즐겨 봤던 드라마는 MBC ‘천사의 선택’. 올케가 여주인공의 남편을 뺏어 결혼하는데, 이 나쁜 올케가 알고 보니 여주인공이 다시 사랑에 빠지는 남자의 여동생이라는 전형적인 막장 극이었다.

개연성도 허술했다. ‘설마 저 장면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진 않겠지?’ 하면 어김없이 그런 일이 벌어지곤 했다. 손가락은 물론 발가락까지 오글거렸지만 어느새 중독됐다.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다른 시청자들의 소감을 확인하고, 빠뜨린 회차는 ‘다시보기’로 챙겨 봤다. 출산 후 ‘야생의 시기’를 산후우울증 없이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아침드라마 덕분이었는지 모른다. ‘저것 봐, 나는 저들보단 잘 살고 있잖아.’

요즘도 평일 쉬는 날엔 오전 8시경부터 30분 간격으로 MBC ‘잘났어 정말’을 찍고, SBS ‘당신의 여자’로 건너간 뒤, KBS ‘삼생이’로 마무리하곤 한다(미니시리즈와 달리 아침드라마는 지상파 3사가 사이좋게 순차적으로 편성한다).

가끔씩 봐도 줄거리는 금세 따라갈 수 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이야기 아닌가. 주로 4명이 짝을 이루는 주연급 캐릭터도 채널마다 비슷하다. 답답하리만치 순진한 여주인공과 그 대척점에 있는 악녀. 여주인공을 배신한 나쁜 남자와 곤경에 빠진 여주인공을 구해주는 왕자님.

아침드라마는 30분의 시간을 살뜰하게 활용한다. 예술적인 연출이나 화려한 세트는 없지만 질질 끌지 않고 전개가 빠르다. 스타급은 아니지만 배우들의 연기력도 나쁘지 않다. 김윤석, 한혜진, 박하선도 알고 보면 아침드라마 출신이었다.

아침밥을 먹으면서, 청소기를 돌리면서, 아이를 재우면서…, 집중이 어려운 상황에서도 순간순간 자극적인 상황이 튀어나와 몰입이 가능하다. 주인공은 매회 한두 번의 위기와 갈등을 겪지만 그녀의 미래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아침드라마는 ‘권선징악’의 규칙을 벗어난 적이 없지 않은가.

치정과 출생의 비밀로 복잡하게 얽혀 있지만 그 결말은 단순하다. 아침드라마가 특히 사랑하는 주제는 ‘한눈 판 남자는 반드시 천벌 받는다’는 것. 이미 권선징악으로 결론 날 것을 뻔히 아는 ‘전지적 시청자 시점’에서 뻔한 소재, 뻔한 주제를 다양하게 변주하는 방식 자체를 즐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침드라마는 시간당 제작비가 미니시리즈의 절반도 안 되지만 10% 안팎의 시청률을 유지한다. 21일 종영하는 120부작 ‘삼생이’의 경우 20%에 가까운 시청률을 기록해 평일 전체 프로그램 중 1위를 차지했다. 방송사에 이만 한 효자가 또 있을까 싶다.

구가인 기자 comedy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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