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미를 통해 인간 존재의 고독을 표현한 원석연의 ‘고독한 녀석’(1988년). 아트사이드갤러리 제공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들다. 개미들의 거대한 군상을, 문수보살의 자비로운 손을 연필 하나로, 그것도 지우개를 쓰지 않고 그려냈다는 사실이 말이다. 사물의 외관을 극사실적으로 단순 묘사하는 차원을 넘어 내밀한 본질을 파헤친 통찰력과 표현력에서 거장의 내공이 빛난다.
연필이 가진 표현 가능성을 무한대로 확장하고 실험했던 연필화가 원석연(1922∼2003)의 10주기 추모전이 마련됐다. 7월 28일까지 서울 통의동 아트사이드갤러리에서 열리는 ‘연필로 그려낸 시대정신’전. 제도권을 기웃거리지 않고 60여 년을 연필그림에 천착해온 작가의 삶과 예술을 기리는 화집이 열화당에서 출간된 것도 뜻 깊다.
그를 대표하는 개미를 주제로 한 대작과 연작이 압권이다. 탱크가 지나간 자국과 고무신 한 짝이 나동그라진 길바닥에 수천 마리 개미가 모여든다. 서로 악다구니를 벌이는 개미들, 허리가 동강 난 개미들이 모인 1950년 작품은 전쟁으로 파괴된 인간 군상을 상징한다. 개미 한 마리만 덩그러니 담은 작품은 존재의 원초적 고독을 은유한다. 청계천변 풍경, 마늘 두릅, 도끼와 가위 등 서민에게 친숙한 풍경과 소품을 그린 그림마다 궁핍했던 시절의 애환이 스며 있다. 치밀한 묘사와 과감한 생략, 대담한 구도와 파격적인 공간 구성이 어우러진 작품들은 볼수록 매혹적이다.
연필화의 가치를 몰라주는 현실에서 실물 크기 개미 한 마리 그려놓고 똑같은 크기의 유화와 같은 가격이 아니면 안 팔겠다고 고집을 세울 만큼 작업에 자부심을 가졌던 화가. 그가 미술사에서 잊히지 않도록 1주기 5주기 10주기 추모전을 마련해온 아트사이드 이동재 대표의 뚝심도 대단하다. 02-725-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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