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 금관총에서 출토된 고리자루큰칼(환두대도)이 1600여 년 만에 답답한 녹을 걷어내고 신비로운 글자를 세상에 드러냈다. ‘이사지왕(尒斯智王).’
칼집의 하단 금동 부분에 새겨진 이 글씨는 일반적인 신라 금석문에서 나타나는 전형적인 신라식 표기다. 수백 기에 이르는 신라 무덤에서 왕명(王名)이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고대 고분 가운데 주인공이 확인된 것은 충남 공주에 있는 백제 무령왕릉뿐이다.
이사지왕이라는 글자가 나왔다고 해서 금관총에 묻힌 주인공을 이사지왕으로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송의정 국립중앙박물관 고고역사부장은 “1921년 금관총 발견 당시 무덤 주인이 칼을 찬 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여성의 무덤으로 볼 수도 있다”며 “이사지왕은 남편이나 친척의 이름일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이사지왕은 누굴까? 신라는 혁거세로부터 경순왕까지 56명의 왕이 이어졌지만 삼국사기 삼국유사 등 사료에는 이사지왕이라는 왕호(王號)가 등장하지 않는다.
우선 이사지왕을 4세기 중반부터 6세기 초까지 신라의 최고 지배자였던 마립간(내물왕 때부터 지증왕 때까지 신라 임금의 호칭) 중 한 명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마립간들이 사용한 다른 이름 중 이사지왕이라는 이름은 나온 적이 없다.
윤선태 동국대 역사교육과 교수는 “칼에 (‘이사지왕’ 외에도 따로) 새겨진 ‘이’자는 이사지왕이 자신의 소유물임을 나타내려는 표시가 분명하다”며 “이사지왕이 살아 있을 때 애용했던 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한상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교수는 “글자가 새겨진 칼은 전형적인 5세기 후반의 칼로, 동그란 고리가 3개 달려 있어 당시의 환두대도 중 최고급품”이라며 “왕이나 왕족에 해당하는 최고위층이 쓴 칼일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사지왕에서 ‘이’를 빼면 신라의 21대 왕 소지왕(炤知王·재위 479∼500년)과 발음이 비슷한 ‘사지왕’이 되는데, 소지왕 재위 기간이 금관총 및 환두대도의 제작 시기와 겹친다는 점에서 소지왕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신형식 상명대 초빙교수도 소지왕일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점쳤다. 신 교수는 “소지왕은 4, 5세기 김씨 왕통을 확실히 이어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이사지왕을 당시 ‘왕’으로 불렸던 고위 귀족 중 한 사람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경북 포항 냉수리 신라비(503년 건립)에 보이는 ‘차칠왕(此七王)’ 같은 기록은 마립간이 아닌 귀족도 왕으로 불렸다는 해석을 뒷받침한다. 신라에서 6세기 전반까지 왕의 근친에게 갈문왕이라는 칭호를 내렸다는 기록도 있다.
이도학 한국전통문화대 문화유적학과 교수는 “이사지왕은 고위 왕족의 이름일 가능성이 높다”며 “진흥왕순수비에는 진흥왕을 진흥태왕(太王)으로 칭했는데, 이는 태왕 밑에 소왕(小王)이 여럿 있었음을 뜻한다”고 말했다. 송의정 부장은 “이사지왕을 고위 귀족으로 본다면 금관총 천마총 등 금관이 출토된 신라 무덤을 마립간의 무덤이라고 추정해 온 연구들은 재검토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한 신라 유물 전문가는 “신라 김씨 왕족의 조상이 알타이 혈통이라는 학설이 있는데, 김씨 왕족이 정신적 고향으로 여긴 알타이 산 부근의 카자흐스탄 이식(Issyk) 지방이 이사지왕의 ‘이사’ 발음과 비슷하다. 신라 왕족의 조상을 기리는 뜻에서 칼에 새긴 것일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이사지왕은 신라의 장군 이사부(異斯夫)와도 이름이 비슷하다. 이사부는 생몰연도가 정확하지 않지만 소지왕∼진흥왕 시대의 인물로, 가야국과 우산국(울릉도)을 정복하고 고구려를 물리친 군사영웅이란 점에서 죽은 뒤 흥무왕이란 시호를 받은 김유신처럼 왕으로 봉해졌을 수 있다.
이번에 확인된 ‘이사지왕’ 외에 숫자를 나타내는 한자들에 대해 박물관 측은 “나머지 유물까지 분석해 봐야 숫자의 의미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신성미·박훈상·우정렬 기자 savoring@donga.com
::금관총(金冠塚)은?
1921년 9월 경북 경주 노서동의 한 집터 공사 현장에서 우연히 발견된 돌무지덧널무덤(적석목곽분)이다. ‘황금의 나라’ 신라를 상징하는 금관(사진)이 처음 출토돼 금관총이란 이름이 붙었다. 금관뿐 아니라 관모 장식, 금제 허리띠, 목걸이, 귀고리 같은 각종 장신구류와 무기류를 포함해 유물 200여 점이 발견됐다. 당시 조선총독부와 일본인 학자들이 조사를 독점해 정확한 유물에 대한 정보가 남아 있지 않다. 축조 연대는 5세기 중·후반에서 6세기 초로, 원래 규모는 대형 고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금관총 발견 이후 서봉총 금령총 천마총 황남대총 등 경주 곳곳의 무덤에서 금관이 잇따라 발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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