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래스카 산맥 빙하관광에 나선 여행자들이 루스 빙하에 착륙한 경비행기에서 내려 설원을 걷고 있다. 여기선 왼편에 치솟은 매킨리 산 정상이 빤히 올려다보인다. 알래스카=조성하 여행전문기자 summer@donga.com
1867년 10월 18일 오전. 알래스카 피오르의 작은 항구 시트카에선 미국과 러시아의 의장대가 주지사 관저 앞에 도열했다. 러시아가 720만 달러에 매각한 알래스카를 미국에 넘겨주는 영토 양도식이었다. 첫 순서는 쌍두독수리 문양의 러시아제국 깃발 하기(下旗). 러시아 병사가 줄을 당겨 국기를 내렸다. 그런데 조금 내려온 뒤로는 도대체 움직이지 않았다. 병사는 깃대를 타고 올라가 엉킨 줄을 풀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다른 병사가 시도해도 결과는 마찬가지. 제국의 깃발은 세 번째로 오른 병사의 손에 줄이 풀려 가까스로 내려졌다. 러시아엔 천추의 한을 남기고 미국인에겐 회심의 미소를 짓게 한 돈 덩어리 땅, 알래스카의 미래를 예고하는 해프닝이었다.
그렇다. 러시아의 깃발마저 내려가기를 주저하게 했던 이유는 29년 후 밝혀졌다. 유콘 강의 클론다이크 지역에서 시작된 골드러시(1896∼1899년)다. 무려 57만 kg의 금이 채굴됐다. 그런데 미국은 이보다 6년 앞서 땅값 이상의 큰돈을 이미 챙겼다. 영국에 물개 포획 허가(매년 100만 마리)를 내주고 받은 돈인데 20년간(1870∼1890년) 수입이 1200만 달러에 달했다. 이것만 보면 러시아가 큰 손해를 본 게 분명하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팔지 않았더라면 호시탐탐 알래스카를 넘보던 영국에 무력으로 점령당할 게 뻔해서였다. 그러느니 팔아서 한 푼이라도 챙기는 게 낫다는 게 당시 차르(황제) 알렉산드르 2세의 생각. 그러니 결국은 러시아도 720만 달러를 번 셈이다.
그렇다면 이 거래에 패자는 없는 걸까. 그렇지 않다. 승자가 있다면 반드시 패자가 있는 법. 그건 영국이었다. 차르는 미국에 앞서 영국에 거래를 제안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영국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미국인은 정부의 알래스카 구매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여론은 반반이었다. 당시 윌리엄 수어드 국무장관을 ‘쓸데없는 짓 했다’고 몰아세운 이도 많았다. 알래스카 면적은 미국 전 국토의 5분의 1, 가장 넓은 텍사스 주의 두 배.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은 알래스카의 태평양 연안에 동부처럼 도시가 들어서려면 천년은 걸릴 거라 했다. 하지만 첫 도시가 생기기까지는 50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알래스카는 이렇듯 상상을 뛰어넘는 미래의 땅이다. 그래서 공식 모토도 ‘미래지향적인 북방(North to the Future)’이다.
내게도 알래스카 여행은 지난달 찾은 게 처음이었다. 사실 알래스카는 미국 어떤 곳보다도 낯익다. 민간항공기가 지금처럼 단숨에 태평양을 횡단하지 못해 북극항로를 이용하던 지난 세기 후반, 중간 급유차 착륙하던 앵커리지 공항에서 한두 시간씩 체류하던 경험 덕분이다. 그래서일까. 알래스카에 대한 관심은 미국 그 어떤 오지보다도 높았다. 그래서 언젠가 오리라 다짐했는데 그게 올해에야 이뤄진 것이다.
그런 알래스카에서도 내 관심은 온통 빙하에 쏟아졌다. 북미 최고봉인 매킨리 산과 주변 알래스카 산맥의 깊은 계곡을 메우고 있는 빙하인데 극지방을 빼고는 지상에서 가장 크다. 난 그 일단을 지난해 이맘쯤 이웃한 유콘 준주(캐나다)에서 봤다. 그곳은 클루아니 국립공원인데 세스나기상의 공중에서 본 빙하 모습은 알프스(유럽)나 서던알프스 산맥(뉴질랜드 남섬)과 판이했다. 규모는 광대했고 퇴각과 생성 등 활동 또한 활발해 보였다. 그래서 알래스카에서 첫 일정도 경비행기를 이용한 빙하투어를 선택했다.
이튿날 오전 8시 15분. 나는 앵커리지 역에서 페어뱅크스행 알래스카철도의 관광열차에 올랐다. 빙하관광 경비행기가 뜨는 북위 62도의 오지마을 타키트나로 가기 위해서다. 내가 예약한 일등칸은 복층열차로 객실은 2층(1층은 식당)에 자리 잡아 전망이 좋았다. 게다가 양측 파노라마 윈도는 유리창이 지붕까지 연결돼 높은 설산과 하늘까지 시원스레 조망됐다. 타키트나까지는 112km. 하지만 열차는 세 시간이나 달린다. 굴곡이 많은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관광객에게 주변 풍광을 즐기도록 하기 위해서다. 주변에 야생동물이 나타나면 그 자리에 서기도 한다. 또 경치 좋은 곳에선 속도를 줄인다. 객차에선 식사도 제공하고 바에선 음료도 준다. 물론 일등칸만의 서비스지만.
북미대륙에서 가장 높은 매킨리 산 바로 앞으로 빨간 빛깔의 빙하투어 경비행기가 날고 있다. 좌우로 펼쳐진 설산의 파노라마 산경은
알래스카 산맥으로 계곡의 상당 부분이 아직도 빙하에 덮여 있는데 알래스카는 지구상에서 극지방을 제외하고 빙하가 가장 잘 발달한
곳이다.타키트나는 알래스카 산맥(드날리 국립공원)의 빙하가 녹아 이룬 출리트나 등 강 셋이 모이는 곳. 일대는 두꺼운 빙하가 녹으며 드러난 땅으로 그 끝에 알래스카 산맥이 자리 잡은 형국이다. 그러니 타키트나에선 매킨리 산 등 알래스카 산맥의 설산이 중간에 아무 장애물 없이 훤히 조망된다. 그런 장소가 타키트나엔 딱 한 곳 있는데 구릉 꼭대기에 자리 잡은 ‘타키트나 알래스카 로지’다. 타키트나는 매킨리 산 등정의 전진기지이기도 하다. 등정신고서를 제출할 국립공원사무소가 여기 있고 베이스캠프까지 인력과 물자 수송을 맡아줄 항공사도 여기 있다.
내가 예약한 K2항공도 그런 일을 도맡은 곳 중 하나. 제2차 세계대전 공군 조종사 출신의 행크 러스트 씨가 1963년에 세스나기 한 대로 운항을 시작해 올해 50주년을 맞은 가족기업이다. 나는 두 시간의 투어비행 도중 빙하에 착륙해 30분간 지내는 ‘드날리 그랜드투어’(1인당 385달러)를 선택했다. 조종사는 일행 4명을 드날리 산맥의 명소로 데려갔다. 마운트 헌터(4427m), 실버스론(4029m), 그리고 여러 빙하, 마지막으로 구름이 드리운 매킨리 산의 북봉(5934m)과 최고인 남봉(6193m) 주변으로. 6000m에서 1000m사이 고도를 오르 내리며 이리저리 설산의 빙하계곡을 날아다니는 빙하비행. 그 대미를 장식한 건 루스 빙하의 설원 착륙이었다. 햇볕 내리쬐는 푸른 하늘 아래 순백의 빙하설원에서 보낸 30분.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 되기에 충분한 알래스카의 선물이다.
타키트나에도 다운타운이 있다. 그래 봐야 오두막 20여 채가 전부인데 그 분위기는 참으로 호젓하다. 1910년대 개척 당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모습이라서 그런데 대표적인 곳이 ‘타키트나 로드하우스’다. 1914년 건축된 이집은 식당과 빵집, 여관을 겸한다. 아침식사로 팬케이크나 와플을 내는데 이 마을에서 꼭 맛봐야 할 음식으로 소문났다. 미국인이 좋아하는 시나몬 롤(계피 빵)도 맛있다. 다운타운 옆엔 호수 세 개가 있는데 그 호반을 걷는 산책로도 예쁘다.
드날리 국립공원(입구)은 타키트나에서 기차로 4시간 40분을 더 간다. 이 구간은 알래스카철도에서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곳. 그래서 기차도 천천히 운행한다. 국립공원 방문객은 입구에 차를 세운 뒤 지정된 순환버스를 이용해 공원을 관 광한다.
■Travel Info
항공: 앵커리지는 인천공항에서 직항편이 없으므로 시애틀에서 갈아탄다. 시애틀∼앵커리지는 세 시간 소요. 입국 수속은 시애틀. 짐은 찾아서 세관 통관 후 앵커리지행 컨베이어벨트에 다시 올린다. 접속편을 타느라 시애틀 공항에서 네 시간 이상 기다릴 경우 시애틀 시내 스타벅스 1호점(파이크 플레이스 소재)도 다녀올 수 있다. 공항을 오가는 경전철로 유니버시티 스트리트에서 하차, 도보 10분.
밸디즈: 프린스윌리엄사운드 관광의 중심지로 혹등고래 범고래의 유영과 컬럼비아 빙하의 부빙(浮氷)을 관찰하는 스탠스티븐스 크루즈(www.stanstephenscruises.com)의 출발(5월 18일∼9월 15일)항. 연간 7.6m의 강설에 힘입은 설상스포츠의 메카로 익스트림 스키 천국인 부근 추가치 산맥에선 헬리 스키를 즐긴다. 1964년 대지진 때 올드타운이 수장돼 현재 모습은 1970년대 이후 것이다. 그 역사는 밸디즈 박물관에서 만날 수 있다. 1989년 엑손석유의 유조선 기름유출 사고 현장 역시 이 앞바다다. www.valdezalaska.com
이번 알래스카 취재는 앵커리지 중심으로 4, 5일간 다양한 시닉 바이웨이(Scenic Byways)로 다니는 여행이 주제였다. 시닉 바이웨이는 미국 연방정부가 공식 인정하는 ‘아름다운 샛길’. 이번 루트엔 도로는 물론이고 철도 뱃길까지 포함됐는데 알래스카를 처음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알맞은 일정과 테마였다. 알래스카 머린하이웨이 시스템: 줄여서 AMHS(Alaska Marine Highway System)라고 불리는데 글자 그대로 ‘해상고속도로’다. 알래스카 주는 미국 본토와 격리돼 있다. 게다가 스카그웨이 등 33개 도시와 타운은 육로 접근이 불가능한 피오르 항구도시여서 뱃길만이 유일한 접근로다. AMHS는 이런 곳을 이어주는 뱃길과 선박인데 총 구간은 최남단의 벨링햄(시애틀 부근·워싱턴 주)과 최북단의 알류샨 열도(알래스카 주 서부)의 언알래스카를 잇는 5600km다. 1963년에 만들어져 올해로 50주년을 맞았는데 현재 11척의 다양한 크기의 선박이 승객과 화물(자동차 포함)을 싣고 알래스카의 태평양 연안을 오간다.
내가 이번 여행 중에 이용한 AMHS 구간은 밸디즈∼휘티어 구간(소요시간 5시간 45분). 그 바다는 남쪽에서 대양을 가로막는 거대한 두 섬이 방파제 역할을 해 호수처럼 잔잔하다. 또 해안은 추가치 산맥의 국가삼림보호지역으로 둘러싸며 풍광이 기막히게 아름답다. 게다가 이곳엔 캘리포니아 바다에서 새끼를 낳아 키운 고래가 한여름 내내 이곳의 풍부한 먹이를 먹기 위해 찾아와 노니는 프린스윌리엄사운드가 있다. 그래서 항해 중에 고래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멋진 바다다.
수어드 하이웨이: 휘티어에 도착한 이후 여행 일정은 여기서 렌터카로 알리에스카 스키리조트가 있는 거드우드로 가 헬기로 빙하에 착륙하는 비행투어를 하며 하루를 묵는 것이었다. 그런 다음 앵커리지로 돌아가는 일정이었는데 그 길이 거드우드 남쪽 해안의 수어드와 앵커리지를 잇는 203km(4시간 소요)의 수어드 하이웨이였다. 이 도로는 미국 전국의 경관도로 중에서도 최고로 손꼽히는데 거기서도 최고의 경관 구간은 앵커리지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추가치 산맥 서편의 조수간만 차가 심한 길쭉한 물길 턴어게인 암(Turnagain Arm)을 끼고 달리는 구간이다. 거드우드에서 앵커리지로 북행하다 보면 오른편 추가치 산맥의 밀림 무성한 산자락 절벽에 폭포가 줄줄이 걸려 있는 모습을 본다. 그리고 왼편은 길쭉한 바다인데 거기선 하얀 벨루가(돌고래 모습의 해양포유류)를 볼 수 있다.
알래스카철도: 이것 역시 시닉 바이웨이에 포함돼 있는데 구간은 수어드와 페어뱅크스를 잇는 752km(16시간 소요). 이 중 연중 운행구간은 앵커리지∼페어뱅크스뿐으로 중간의 타키트나와 드날리는 한여름 관광 철에 늘 정차한다. 이 열차가 보통 열차와 다른 점이라면 승객이 원하는 곳에선 언제든지 세워서 타고 내릴 수 있다는 것―이걸 미국에선 ‘깃발 정차(Flag Stop)’라고 한다―이다. 알래스카철도에서 가장 경관이 아름다운 곳은 타키트나∼드날리 국립공원 입구, 허리케인 계곡의 철교 구간. 수어드 하이웨이 최고 경관인 턴어게인 암 구간 역시 이 열차가 통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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