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일요일 낮과 밤. 이탈리아 국영방송 Rai3 채널을 틀면 미술 프로그램 ‘파스파르투(Passepartout)’가 나왔다. 만화 주제곡 풍의 시그널 음악은 전자음과 클래식으로 번갈아 연주됐다. 음악이 끝나면 곱슬머리에 안경을 코 위에 살짝 걸치고 나비넥타이를 맨 그가 등장한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존경받는 예술 평론가 필리페 다베리오다.
영상 속 다베리오는 유쾌하고 익살스럽다. 때론 진지하다. 그를 좇아 가다 보면 방영시간 30분이 훌쩍 지나간다. 이탈리어를 몰라도 그가 ‘판타스틱’을 외칠 때면 함께 흥분한다. 방송은 이탈리아 현지에서 꾸준히 인기를 끌어 2001년부터 10년 넘게 장수하고 있다.
다베리오는 프로그램 내용을 책으로 옮겨 2011년 11월 이탈리아에서 출간했다. 책은 방송보다 더 큰 성공을 거둬 예술서적임에도 종합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이번에 ‘상상박물관’이란 제목으로 국내에서 발간된 이 책에는 오랜 방송 진행 노하우가 녹아 있어 읽으면 한 편의 쇼를 보는 기분이 든다.
책은 원서처럼 문어체가 아닌 구어체로 번역됐다. 훈계조는 찾을 수 없고 재잘재잘 떠드는 수다에 가깝다. 사람을 집중하게 만드는 텔레비전의 힘이 책에 담겼다. 번역가 윤병언 씨는 “미술을 모르는 사람도 그를 따라가다 보면 책 속의 그림을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고 권한다.
상상박물관은 저자가 머리로 그려 낸 박물관이다. 박물관 도면이 있어 독자도 머릿속에 쉽게 그려 볼 수 있다. 저자는 지하 1층, 지상 3층 규모의 공간을 만들었다. 지하층엔 부엌과 지하창고, 세탁실, 1층엔 도서관과 식당, 생각하는 방, 2층엔 그랑갤러리(전시·이벤트 공간)와 손님방, 3층엔 침실과 욕실이 배치됐다. 이제 저자는 박물관 곳곳에 그림 220여 점을 채운다. 집 구경하듯 집 안 곳곳에 걸린 그림을 함께 보는 수고만 하면 된다.
아이들 장난 같다고? 충실한 디테일 덕분에 박물관 동선이 삐걱거리지 않는다. 1층 손님대기실과 건물 서쪽 공간 사이에 놓인 놀이방에 대한 설명이다. “시가 냄새가 배어 있는 곳이라 아침에 들어가면 항상 반갑지만은 않은 곳입니다. 남자 냄새죠. 그래서 다음 방으로 슬그머니 건너가고 싶은 생각이 드는 곳입니다.” 이쯤 되면 상상이 아니라 실제다.
상상박물관엔 소소한 행복도 있다. 바로 저자와 나의 취향이 맞아떨어질 때다. 3층 욕실 문을 열기 전 나는 자크 루이 다비드 ‘마라의 죽음’이 걸려 있었으면 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욕실에 들어서자 ‘마라의 죽음’이 떡하니 눈에 들어왔다. 등나무 소파에 앉은 저자는 말한다. “다비드의 걸작을 욕실에서 포기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자는 가끔 핀잔도 줬다. “책 속 그림을 10초도 바라보지 않으리라”고.
저자는 상상박물관을 읽을 때 인터넷을 켜 놓길 권한다. 책에서 설명이 안 된 부분은 자유롭게 인터넷을 찾아서 보라는 것이다. 그림을 볼 때도 굳이 박물관에 가지 않고 인터넷에서 내려받아 봐도 된단다. 인터넷에서 내려받은 얀 반 에이크의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화’는 마우스 커서를 움직이며 꼼꼼히 살펴보길 저자는 추천한다. 그래야 그림 속에 숨겨진 숨 막히는 디테일을 찾을 수 있다. 220점 중에 의외로 다빈치의 ‘모나리자’는 빠져 있다.
이제 상상박물관 입장료를 따져볼 때다. 입장료(책값)는 5만4000원. 비싸다. 하지만 외국의 유명 박물관을 가기 위한 비행기 삯, 입장료를 머리에 그려 보자. 사람들의 뒤통수에 가려진 그림을 까치발로 서서 봐도 몇 초도 안 돼 뒷줄에 떠밀리는 현실을 고려한다면 결코 나쁜 가격은 아니다. 게다가 저마다 박물관을 머릿속에 그려 보는 재미가 있다. 나는 한 칸 갤러리를 만들었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