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 리뷰]배우 연기는 참∼ 좋은데… 심장 때리는 멜로디 실종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11일 03시 00분


뮤지컬 ‘스칼렛 핌퍼넬’ ★★★

보석 같은 악역 에녹. 핏빛 단두대 아래 위태롭게 흔들리는 혁명정부를 부축하듯 묵직한 노래로 분투한다. CJ E&M 제공
보석 같은 악역 에녹. 핏빛 단두대 아래 위태롭게 흔들리는 혁명정부를 부축하듯 묵직한 노래로 분투한다. CJ E&M 제공
주연 박건형은 준치가 제 바다 만난 듯했다. 비장한 합창과 익살맞은 애드리브의 간극을 어색함 한 톨 없이 미끄러지듯 오갔다. 악역을 맡은 에녹은 검은 옷을 입은 백미(白眉)였다. 중후하면서도 맑은 목소리가 폭포처럼 시원했다.

커튼콜 때 무대에 올라온 연출가 데이비드 스완과 작곡가 프랭크 와일드혼은 2004년 한국에 ‘지킬 앤 하이드’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콤비. 2억 원을 들였다는 200여 벌의 귀족 의상, 척척 아귀 맞아 돌아가는 무대장치도 흠잡을 구석이 없었다. 하지만 막이 내려진 후 객석에 남은 것은, 헛배부름의 허기였다.

스토리의 흡인력이 부족한 탓일까. 원작을 살펴보면 그렇다 하기 어렵다. ‘스칼렛 핌퍼넬’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1793∼94년)에 맞선 복면 영웅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픽션. 영국의 귀족 한량 퍼시가 시민혁명군 출신 프랑스인 아내의 배신을 의심해 비밀결사대장으로 변신하는 이야기다.

1903년 헝가리 망명 귀족 출신의 영국 여성 작가 에마 오르치가 농민혁명으로 조국에서 쫓겨난 가족사를 모티브 삼아 썼다. ‘조로’ ‘배트맨’ 등 가면 뒤로 정체를 감춘 히어로의 원조 격인 셈이다. 후배 히어로들의 인기를 감안하면 재미없기 힘든 태생이다. 넉넉하지 못한 살림에 보태려고 출산 직후 소설을 쓰기 시작한 오르치는 1.5달러짜리 데뷔작의 인기 덕에 이후 10여 편의 속편을 발표했다. 1934년에는 영화로도 제작됐다.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 뮤지컬 초연의 반응은 어땠을까. 1997년 11월 10일 뉴욕타임스(NYT)는 “가슴 뛰는 긴장과 희열을 찾는 관객이라면 어젯밤 첫 막을 올린 이 뮤지컬을 보느니 차라리 타임스스퀘어에 서서 그곳을 오가는 관광객들의 모습을 구경하는 편이 나을 것”이라고 혹평했다.

문제는 음악이다. 150분 넘게 앉아 보고 나왔는데도 극장 문을 밀며 흥얼거리게 되는 멜로디가 없다. “온종일 이지 리스닝 계열 음악만 내보내는 라디오를 듣는 기분으로 러닝타임 내내 바닥에 드러누워 잠들고 싶은 욕망과 힘겨운 싸움을 벌여야 한다”던 16년 전 NYT의 독설에 고개 끄덕이게 만든다.

그러나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 1907년 8월 4일 NYT는 영국 런던에서 700회 넘게 공연된 ‘뮤지컬 코미디 스칼렛 핌퍼넬’에 대해 “최악의 미국 연극, 런던에서 최고의 흥행을 이루다”라는 제목으로 장문의 리뷰 기사를 썼다. 현대 버전 뮤지컬이 초연된 다음 해인 1998년에도 ‘스칼렛 핌퍼넬’이 토니상 최우수작품상, 각본상, 남우주연상 후보에 오르자 “비평가들이 죽이려 든 작품을 대중이 살렸다”는 기사가 실렸다.

굴곡 적은 스토리에 비해 러닝타임이 길다. ‘남의 나라 혁명정부에 저항하는 귀족’에 대한 영웅화도 살짝 불편할 수 있다. 하지만 시야를 좁혀 여유만만 호연을 펼치는 박건형, 죽어 넘어진 멜로디에 목소리로 숨을 불어넣듯 하는 에녹 등 배우들에게 집중한다면 충분히 즐겁게 볼 수 있다. 극 중반 단두대 전투 장면에서 뿜어 나오는 배우들의 열정을 작곡가가 봤다면, 슬그머니 미안해지지 않았을까.

박광현 한지상 김선영 바다 양준모 출연. 9월 8일까지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 5만∼13만 원. 1577-3363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스칼렛 핌퍼넬#뮤지컬#박건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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