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문학, 독자와의 거리 좁히기… 팟캐스트-EBS 등 낭독 프로그램 붐
문인 명사 성우들이 연출-진행 맡아
작품성 못잖게 살아있는 입말 중요, 신규독자 확대로 이어질진 미지수
8일 서울 서교동의 한 녹음 스튜디오에서 문학 전문 인터넷 라디오 ‘문장의 소리’ 연출자인 김경주 시인(왼쪽)이 엔지니어와 상의 도중 카메라를 보며 웃고 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 서울 서교동의 한 녹음 스튜디오. 녹음부스 속 DJ의 차분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방음벽 너머 조정실로 전해진다. “애착과 두려움, 포근함과 경계가 늘 공존하는 게 공간의 필연적 속성일 텐데요. 마음의 공간도 그렇지 않을까 합니다. 여름밤, 마음의 공간을 채워 넣을 책 한 권과 함께하시는 건 어떨까요?”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을 듣는 듯한 나른함에 한참 취해 있을 즈음, ‘철컥’ 녹음부스가 열리더니 DJ가 얼굴을 내민다. 장편소설 ‘능력자’의 작가 최민석이다. 조정실에 앉은 PD는 시인 김경주다. 》
문인들이 직접 연출과 진행을 맡은 이 방송은 문학전문 인터넷 라디오 프로그램 ‘문장의 소리’. 신작 시를 골라 소개하는 ‘낭독하는 녹음실’과 화제 작가를 초청해 인터뷰하는 ‘작가의 방’이 주요 코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블로그 ‘문장’에 매주 한 차례 1시간가량의 녹음분이 올라간다.
‘문장의 소리’가 첫 녹음을 한 것은 8년 전. 문학 독자가 급감하는 현실에서 문학이 지닌 낭독의 매력을 통해 독자와의 거리를 좁혀 보자는 취지로 시작했다. 김경주 시인은 “문학 독서가 소리의 질감과는 거리가 먼 묵독(默讀) 중심이 되면서 독자들이 책에서 멀어졌다”며 “문학 주변부를 떠도는 ‘가(假)독자’를 ‘진(眞)독자’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낭독 운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BS 라디오의 ‘라디오 연재소설’은 전문 성우나 명사가 미발간 신작 소설을 낭독하는 프로그램이다. 가수 요조가 소설가 심윤경의 신작 ‘사랑이 채우다’를 낭독하고 있다. EBS 제공낭독 본연의 매력을 살리는 데 집중하는 라디오 프로그램도 있다. EBS 라디오의 ‘라디오 연재소설’(월∼금 오후 8시)은 성우나 명사가 발간 전의 신작 소설을 낭독해주는 프로그램이다. 최근에는 탤런트 우희진이 조영아 작가의 중편소설 ‘헌팅’을 낭독하고 있다. “종일 장사를 하거나 운전하는 분처럼 여러 사정으로 책에서 멀어진 분들께 ‘전기수(傳奇수·조선시대 이야기책 전문 낭독자)’ 같은 역할을 하고 싶다”는 게 연출자 방영찬 PD의 변이다.
낭독을 중시하다 보니 작품 선정 기준부터 남다르다. 방 PD는 “문학적 완성도 못지않게 입말이 살아 있는지를 중시한다. 눈으로 볼 때도 책장을 앞뒤로 넘겨 봐야 하는 작품은 들어서는 이해하기가 너무 어렵다”고 했다. 40분의 방송시간 동안 낭독 중간중간에 음악을 틀어주고 성우가 앞서 내용을 요약해 주는 점이 낭독만으로 진행되는 오디오북과의 차이점이다.
출판사도 ‘듣는 문학’ 붐 조성에 한몫하고 있다. 도서출판 창비는 올 2월부터 팟캐스트(인터넷 음성·영상 방송) ‘라디오 책 다방’을 시작했다. 반응이 좋아 최근 업데이트 횟수를 매달 2회에서 4회로 늘렸다. 소설가 김영하가 직접 낭독과 해설을 맡아 유명해진 팟캐스트 ‘책 읽는 시간’이나 ‘책 읽는 라디오’도 듣는 문학 애호가의 필수 순례 코스다. 황혜숙 창비 인문사회팀 차장은 “당장 책 매출을 늘리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책 자체의 매력을 잠재 독자층에 알리는 장기적 포석에서 이런 시도들이 의미가 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듣는 문학의 유행이 문학 독자층 확대로 이어질지는 여전히 미지수다. 고봉준 문학평론가는 “듣는 문학 프로그램의 청취자 대다수는 읽는 문학에도 관심 많은 기존의 독자층이라 신규 독자 발굴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라며 “문학작품 읽기는 앞으로도 당분간 활자 중심이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듣는 문학이 읽는 문학의 ‘대체재’가 되기보다는 ‘보완재’로 머물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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