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털고 ‘항상 지금’으로 살아가야지”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18일 03시 00분


커피와 스키를 즐기는 선승… 범어사 방장으로 추대된 지유 스님

은사 동산 스님과 사형 성철 스님의 수행처였던 원효암에서 만난 지유 스님은 “기쁘고 괴로운 모든 감정은 물에 비친 그림자와 같다. 그림자는 있다가도 없어지는, 실체가 아닌 것”이라며 무심(無心)을 강조했다. 스님은 청력이 약해져 보청기를 끼고 있지만 법문 때는 거침없는 자유인의 목소리를 들려줬다. 부산=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은사 동산 스님과 사형 성철 스님의 수행처였던 원효암에서 만난 지유 스님은 “기쁘고 괴로운 모든 감정은 물에 비친 그림자와 같다. 그림자는 있다가도 없어지는, 실체가 아닌 것”이라며 무심(無心)을 강조했다. 스님은 청력이 약해져 보청기를 끼고 있지만 법문 때는 거침없는 자유인의 목소리를 들려줬다. 부산=서영수 전문기자 kuki@donga.com
“마음을 알면 바로 부처요, 한 생각 놓으면 그 자리가 불국토입니다.”

지난달 금정총림(범어사) 최고 어른인 방장(方丈)으로 추대된 지유 스님(82)의 말이다.

스님은 18세 때인 1949년 뛰어난 법문으로 유명한 ‘설법 제일’ 동산 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뒤 선방 수행에 이어 1970년 봉암사, 1975년 범어사 주지를 지냈다. 이후 수행에 전념하면서 언론 인터뷰는 극구 사양했지만 불자들과의 만남에서는 선(禪)과 교(敎)의 정수가 담긴 촌철의 법문을 아끼지 않았다.

2개월여의 인터뷰 요청 끝에 10일 범어사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범어사에서 귀동냥으로 얻은 정보에 따르면 방장 스님의 별명은 ‘갱두(羹頭) 조실’. 절에서 국을 끓이는 소임을 맡은 최고 어른이라? 팔순이 넘은 나이에도 곧잘 공양간에 들어간다는 스님이 직접 만든 국과 자장면, 카레는 스님들 사이에선 꼭 맛봐야 할 ‘사중일미(寺中一味)’라 한다.

이것만이 아니었다. 지유 스님이 커피와 스키 마니아라는 얘기도 들었다. 선승이 커피를 마시고, 스키까지 즐기신다니? 스님의 거처인 원효암으로 향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에 마음이 복잡했다. 염천에 비지땀을 흘리며 산에 오른 지 40여 분 만에 암자가 수수한 자태를 드러냈다. 이곳은 지유 스님의 은사인 동산 스님에 이어 사형인 성철 스님의 수행처이기도 했다.

스님께 삼배한 뒤 말씀을 청하면서 커피 맛을 보고 싶다고 했다. 스님은 커피 대신 미소와 함께 “고생했다”며 선풍기 옆자리를 권했다.

―커피를 즐기고 스키도 탄다고 해서 놀랐습니다.

“여름 바다에서 수영도 곧잘 했는데, 못 한 지 오래됐어.”

―커피는 어떻게….

“1970년대 작설차나 보이차는 값 비싸고 구하기도 어려웠어. 값싸고 쉽게 먹을 수 있는 커피를 먹게 됐지. 먹다 보니 나중에는 관심이 생겨 커피콩도 볶게 됐지. 빈말인지 몰라도 (내가 만든 커피) 맛이 괜찮다고 하데…. 하하.”

―스키는….

“한번은 천마산에서 리프트를 탔는데 정말 호강스럽구나 싶어. 어릴 때 일본에서 타던 대나무 스키가 생각나서 예순하나에 타게 됐어.”(일본에서 태어난 스님은 1945년 광복과 함께 귀국했다.)

―커피나 스키, 수행자와는 어쩐지….

“스키 타고 커피 마시면 이상한 중으로 여기는 게 바로 선입견이야. 공부(수행)를 열심히 할 수 있도록 몸과 마음의 건강을 지킬 수 있으면 그걸로 충분하지. 신도와 제자들, 수십 명이 함께 탈 때도 있어.”

―눕지 않고 수행하는 수십 년의 장좌불와(長坐不臥)를 하고 계신데요.

“몸이 아프거나 피곤할 때 가끔 누워. 잠깐 졸기는 하지만 잠자기 위해 일부러 눕는 법은 없지. 그러나 장좌불와에 큰 의미를 둘 필요 없어. 좋은 것도 다른 사람에게는 독이 될 수 있고 사람마다 수행 방법이 다르니까.”

―선이 어렵다고 합니다.

“어렵다면 그렇게 어려운 것이 없고, 쉽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쉬운 게 없어. 잡념이 없다면 법당서 예불하고, 운동하고, 부엌에서 일하는 게 모양만 바뀔 뿐 다를 게 없지. 거울은 텅텅 비었기에 모든 것을 그대로 비추는 거야.”

스님은 꺼내기 쉽지 않은 질문을 자문자답했다. “‘무엇을 깨달았냐’고 물으면 아무것도 깨달은 것이 없다고 할 것이야. 다만,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내가 숨쉬고 말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어. 지난 과거나 오지 않은 미래에 연연하지 않고 ‘항상 지금’으로 살아가야지.”

―조계종이 10월 총무원장 선거로 도박과 관련한 폭로가 나오는 등 벌써 시끄럽습니다.

“다른 업(業)을 가진 사람들처럼 중도 사람이라서 그중엔 사고뭉치도 있어. 공부해도 안 되니 뜻을 다른 것에 둔 게지. 그래도 반야의 지혜로 탐욕과 어리석음을 이겨내고, 깨닫겠다는 출가의 초심(初心)을 되새겨야지.”

―불자를 포함한 모든 이에게 하고 싶은 말은….

“괴로움과 고통은 무엇인가? 수행자든 일반인이든 모두 털어버려야지. 달마 조사를 찾아온 혜가가 번민을 얘기하자 조사께서는 그걸 가져오라고 했어. 어찌 실체가 없는 것을 가져올 수 있겠나?”

부산=김갑식 기자 dunanworld@donga.com
#범어사 방장#금정총림#지유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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