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6000km 떨어진 서울 집에서 들리는 동생의 목소리는 수화기 너머로 잦아들었다. 끊어지는 통화음 자락에 우당탕 하는 소리가 끼어들었던 듯도 했다. 정신이 멍해졌다. 그 10여 분 전, 정보기관인지 누군가한테서 이상한 전화를 한 통 받았다. 서울에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끊자마자 부리나케 집으로 다이얼을 돌렸던 참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밤 기차를 타고 결혼식 주례를 서기 위해 부산으로 떠났고, 집안 모두 무탈하다는 말 뒤끝에 벌어진 일이었다. 미국 캘리포니아 주 풀러턴에 살던 예종석(60·아름다운 재단 이사장·한양대 경영학부 교수)은 뚜, 뚜 소리가 나는 수화기를 쥔 채 말을 잊었다. 미국시간 1980년 5월 17일, 딸의 백일이었고 늦깎이로 대학을 졸업한 지 보름이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한국 시간으로는 1980년 5월 18일, 소총을 든 군인들이 새벽 군홧발로 집에 들이닥쳤고 아버지는 부산역에서 붙잡혀 중앙정보부 남산 지하실로 끌려갔다. 그날 ‘비상계엄 전국확대’를 알린 동아일보 호외에는 사회혼란 및 소요관련 배후조종 혐의자 ‘예춘호’라는 이름이 김대중 문익환 김동길 고은 인명진 이영희와 함께 실렸다.
“공부 안 하나.”
아버지는 예종석을 볼 때마다 주문처럼 “공부 안 하나”라는 말을 되뇌었다. 1973년 해병대 복무 중이던 그가 휴가를 나왔을 때도 문간에서 마주친 아버지의 첫 마디는 “공부 안 하나”였다. 그의 친구들은 지금도 “군대에서 휴가 나온 아들한테 ‘공부 안 하나’라고 한 아버지”라며 웃는다. ‘공부 안 하나’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은 그는 실제 공부와 담을 쌓고 살았다. “지금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노는 친구들하고 몰려다니면서 싸움질도 하고 학교 담 넘어서 도망가고, 아무튼 나쁜 짓 많이 했어요.” 초등학교 시절 말 잘 듣고 공부 잘하던 그가 딴 길로 샌 데는 아버지가 한몫을 했다.
1963년 11월 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부산 영도에 나와 당선된 아버지는 선거운동 때 “내가 의원이 돼 서울로 가도 자식은 남겨두겠다”는 공약을 걸었다. 당시만 해도 국회의원이 되면 온 가족이 서울에 올라가는 게 관행이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4학년 예종석은 부산에 ‘인질’처럼 남았다. 엄한 초등학교 선생님 댁에서 하숙할 때까지는 속으로 ‘중학생만 되면 불러주시겠지’하며 참았다. 중학교 진학할 때가 됐지만 서울에서는 오라는 전갈 대신 “거기서 고등학교까지 다녀라”라는 지시가 내려왔다. 부아가 치민 그는 경남중에 입학하고 나서 본격적인 말썽꾼이 됐다. “하도 개판을 치니까 1학년 1학기를 마치고 서울 중앙중으로 전학을 시켜주셨지요.”
서울에 와서 그가 모범생으로 돌변한 것도, 부리던 말썽이 어디 간 것도 아니었다. 역설적이게도 아버지가 그를 더욱 비교육적인 환경으로 몰아넣었다. 집권 공화당 사무총장을 지낸 아버지는 1969년 삼선개헌에 반대했다가 제명당했다. 예종석이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집안이 말이 아니게 됐지요. 만날 감시당하고. 게다가 1972년에 제가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때는 아버지가 유신에 반대했으니까…. 공부를 하기도, 학교를 다니기도 싫더라고요.”
유신 반대를 천명한 이후 정권의 박해가 더 심해지자 아버지는 “숨이나 크게 쉬고 살자”며 허허벌판에 가까웠던 서울 강남 논현동에 집을 짓고 이사했다. 집을 짓던 언덕에서 바라보면 오직 국기원만 덩그러니 보이던 즈음이었다. 강남대로 양쪽은 죄다 복덕방뿐이고 비라도 오는 날에는 복덕방에 맡겨 놓은 장화를 신고 진창길을 걸어올라 집으로 가던 때였다.
그즈음 살아가는 게 골치만 아프던 그는 해병대에 입대했다. 해병대에서도 반체제 재야인사의 아들은 고단했다. 이렇게 저렇게 아버지와 엮여 전출만 여덟 번을 다녔다. 고참이 됐어도 졸병들의 번듯한 경례 한번 제대로 받지 못했다. 유신 치하에서 치러진 선거에 감히 반대한다고 했다가 치도곤을 당하기도 했다.
제대하고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려면 미국을 가야 했다. “골치 아픈 집안 환경에서 벗어나고 싶기도 하고, 건달처럼 흥청거리며 놀다 보니 나쁜 친구들 꾐에 빠지기 십상인 제가 공부를 하려면 절간 같은 데를 가야 하는데 그곳이 바로 미국이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아버지한테서 무시로 듣던 “공부 안 하나”가 결국은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의 밑바닥에 깔려 있던 모양이었다.
어머니가 당시 중앙정보부장이던 김재규 씨에게 선이 닿아 “어떻게 아들 앞길까지 막느냐”며 호소해, 나올 것 같지 않던 여권을 받았다. 그새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떠나던 날 아버지는 며느리에게 부탁했다. “제발 부탁하마. 쟤 대학 졸업장 좀 따야 한다.” 그렇게 오른 미국 길이었다.
뜻하지 않던 ‘공부 길’
밤에는 커뮤니티칼리지를, 낮에는 캘리포니아주립대를 다니며 어렵게 학부를 마쳤을 때 예종석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사업 구상이 떠올랐다. 1970년대 말은 한국에서 ‘율산’ 같은 기업을 꿈꾸던 20, 30대 젊은이들의 창업 바람이 한창인 때였다. 정치를 하면서 많이 까먹기도 했지만 6·25전쟁 후 부산에서 행세깨나 하던 아버지 집안의 재력에 기댈 생각도 조금은 있었을 터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5월 광주의 그날’은 모든 것을 날려 버렸다. 아버지가 어디 계신지도 확인할 길 없이 시간은 흘러갔다. 속이 바짝바짝 타들어갔다. 이렇게 돌아가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어떤 지인은 “정치적 탄압을 받는 셈이니 조건이 된다. 망명하라”고까지 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인편으로 아버지의 전갈이 왔다. ‘돌아오지 말고 거기서 공부해라.’ 전언을 전해준 분은 지금 주한미국대사인 성 김 대사의 어머니였다.
삼형제의 장남 노릇을 제대로 할라치면 당장 귀국해 집안을 돌봐야 했다. “그때는 철이 좀 들어서 ‘돌아가야 하는데…. 내가 사람 구실을 못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요.” 하지만 남산 지하실에서 고문을 받으며 곤경에 처한 아버지는 ‘너, 돌아오지 마라. 공부하라’는 메시지를 보내온 것이다. 번민의 밤을 며칠이고 보낸 뒤 아버지 뜻을 따라야겠다고 마음먹은 것이 5월 말이었다.
9월에 학기가 시작되는 미국 학제에서 그 시기에 대학원을 알아보기에는 좀 늦은 감이 있었지만 별 수 없었다. 여기저기 입학 지원서를 넣었고 장학금에 생활비도 조금 보조해준다며 인디애나대에서 오라는 연락이 왔다. 그날로 이삿짐을 꾸려 트레일러에 싣고 직접 운전해 서부 캘리포니아에서 인디애나까지 약 3000km를 횡단했다.
“그렇게 해서 본격적인 공부 길에 접어든 겁니다. 전혀 생각지도 않았는데 여건이 그렇게 만든 거였지요. 좀 어이없기도 하고….”
그해 여름 아버지는 군사재판을 받기 시작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형 구형을 받자 아버지는 홀로 “우리 같은 사람은 괜찮지만 정치적 지도자는 죽이면 안 된다”고 엄혹한 재판정에서 외쳤다. 그런 소식을 접하며 에어컨이 나오는 도서관에서 공부를 해야 하는 그의 마음은 갈등으로 가득했다. 그런데 그럴수록 오히려 힘이 된 사람은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감방에서 고생하시는데 내가 이걸 못하겠느냐, 하는 마음이었어요. 아버지도 여러 경로로 메시지를 보내오시는데 한결같이 ‘공부하라’는 것이었고.”
군사법정에서 내란음모사건으로 12년 형을 선고받은 아버지는 1982년 3월 원주교도소에서 형집행정지로 출소했다. 들어갈 때 100kg이던 분이 얼음장 같은 교도소 독방에서 55kg으로 변해 나왔다. 당시 석사학위를 받았던 예종석은 공부를 접으려고 했다. 집안 사정도 있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없어 미국 생활이 쪼들려 갈 때였다. 잠시 귀국해 인사를 드리자 아버지가 야단을 치셨다. “너 왜 왔느냐. 취직은 무슨 취직. 공부나 해라.”
쫓기듯 미국으로 돌아와 박사과정을 마치고 졸업시험을 보는데 한국에서는 아버지의 단식 소식이 들려왔다. 당시 김영삼 씨가 군부독재에 항거하는 단식을 시작하자 이에 동조한 것이었다. 죽음을 각오하고 굶고 있는 아버지를 머릿속에 그리며 아들은 죽기 살기로 졸업시험에 매달렸다. 그렇게 박사를 따고, 교수가 됐다. “파란만장, 우여곡절이었어요.”
‘즐거운 앵벌이’
1959년 예종석이 여섯 살 무렵, 새벽마다 아버지의 손을 잡고 산을 하나 넘어서 부산 영도구 동삼동 산자락으로 출근하다시피 했다. 그곳에서는 주한미국경제원조처(USOM) 돈을 얻어낸 아버지의 지휘로 난민주택 600동이 들어서고 있었다. “새벽같이 간 이유는 누가 자재를 빼돌릴까 걱정하셨기 때문이었어요.” 4·19 지나서 완공된 집들은 피란민들에게 무료로 돌아갔다.
그가 ‘르네상스적 인간’이라 칭하는 아버지 예춘호는 정치인이었지만 낚시, 서예, 책, 서화·골동품 수집, 조경, 분재 등에서 취미 수준이 아니라 경지에 오른 인물이다. 그러나 성장기의 예종석에게 좀 더 영향을 미친 것은 아버지의 다방면에 걸친 재능보다는 낮은 곳을 향한 사회사업가로서의 열성이었다. 아버지는 1964년에 장서 2만 권을 활용해 지금의 영도 봉래시장 안에 영도도서관을 꾸렸다. 민주당 문재인 의원도 어렸을 때 이곳에서 책을 읽곤 했다. 고등공민학교를 지어 무상교육을 펼쳤고 무료 탁아소, 무료 유치원, 무료 예식장 사업도 했다. 예종석이 현재 기부단체인 ‘아름다운 재단’을 이끌게 된 것도 그런데 영향을 받은 것이다.
“제가 비영리 쪽 일을 하게 된 것도 아버지 덕분이 좀 있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그런 사업 하시는 걸 보고 자랐으니 기부사업을 맡게 된 계기라면 계기지요.”
‘기부’라고 하면, 부자들만 한다거나 이재민에게 보내는 성금 정도로 생각하는 국민의 인식을 조금은 바꿔 놓은 것이 아름다운 재단 같은 풀뿌리 기부 단체다. ‘이 세상에 나눌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은 없다’는 말처럼 어느 누구라도 남을 위해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알려준 것이 ‘1% 나눔 운동’이었다.
“서울 성수동에서 구두 수선을 하시던 이창식 선생이 계셨어요. 매달 1만 원씩을 보내오셨어요. 한 달에 100만 원 버신다고. 그분이 그래요. 기부가 자신의 삶을 바꿔놓았다고. 돌아가실 때까지 행복해하셨지요.”
고민이라면 한때 상임이사와 이사를 했던 박원순 서울시장과 무소속 안철수 의원을 아름다운 재단과 연결시켜 정치단체로 간주하는 세간의 시선이다. 아름다운 재단 정관에는 정치를 하는 순간 직을 내놓거나 사임시키게 돼있다. 박 시장은 사표를 냈고, 안 의원은 그가 ‘잘랐다’. 괜한 오해를 샀는지 지난 정부에서는 기업 기부가 대폭 줄었다. 아무리 비영리 단체이지만 기부가 줄면 배분도 줄게 마련이다. “역설적입니다만 그나마 다행인 게 전체 기부 중에서 풀뿌리 기부가 70%를 넘는 이상적인 구조를 갖추게 됐습니다. 하하.”
아버지의 선거운동을 도울 때도 머리 숙여 표 달라는 말 한번 제대로 하지 못해 어머니가 “너 정치 안 되겠다”고 ‘판정’을 내린 예종석. 그가 “돈 좀 달라”며 허리를 팍팍 숙이고 다닌다. “남한테 아쉬운 소리 하는 걸 싫어합니다. 그런데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을 하니까 저절로 나옵니다. 즐거운 앵벌이입니다.” 그가 허허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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