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살인자의 독백 형식, 쉽지 않았죠”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25일 03시 00분


장편 ‘살인자의 기억법’ 펴낸 소설가 김영하

치매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는 연쇄살인범의 독백 형식의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을 펴낸 소설가 김영하. 작가는 신작에서 고전의 지혜를 넘나들며 존재를 규정하는 기억과 망각의 문제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준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치매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는 연쇄살인범의 독백 형식의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을 펴낸 소설가 김영하. 작가는 신작에서 고전의 지혜를 넘나들며 존재를 규정하는 기억과 망각의 문제에 대한 통찰력을 보여준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미국에 있는 친구가 신작의 줄거리를 한 문장으로 압축해 알려 달라기에 ‘치매에 걸린 은퇴한 연쇄살인범이 자기 딸을 구하기 위해 마지막 살인을 준비한다’고 휴대전화 메시지를 보냈어요. 보내놓고 보니 추리물이나 스릴러 소설로 비치겠다 싶더군요. 장르 소설을 쓰려 했던 게 아닌데….”

소설가 김영하가 신작 장편 ‘살인자의 기억법’(문학동네)을 들고 돌아왔다. 장편으로는 지난해 ‘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펴낸 이후 1년 반 만이다. “70세를 맞은 은퇴한 연쇄살인범 ‘나’가 치매 때문에 기억을 잃어가는 가운데 딸 ‘은희’를 노리는 또 다른 연쇄살인범 ‘주태’를 제거하기 위한 준비를 하며 내뱉는 독백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저도 어렸을 적 연탄가스에 중독돼 10세 이전의 기억이 거의 남아있지 않아요. 그 때문에 기억을 잃어버린 사람, 기억을 되찾고 싶은 사람의 얘기가 늘 남 일 같지 않았죠.” 실제로 작가는 급성 치매에 걸려 기억을 잃어가는 젊은 여성(손예진 분)의 사랑 얘기를 다룬 영화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년)의 각색 작업을 맡기도 했다.

“우리 정체성의 핵심은 기억이라고 생각해요. 지금의 나는 결국 내가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에 대한 기억들로 만들어져 있지 않나요? 그런 기억이 흔들리고 잊혀질 때 허물어져 가는 인간의 모습을 그리려 했습니다.” 서로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치매와 연쇄살인범이란 소재를 연결시킨 이유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수십 명의 생명을 빼앗고도 붙잡히지 않은 자부심 강한 주인공이 다른 누군가에 의해서가 아닌 치매 때문에 내면부터 붕괴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맘에 들었어요. 아이러니가 핵심인 고대 그리스 비극의 영향도 받았고요.”

신작을 읽다 보면 이 소설이 그리스 비극에 대한 작가의 ‘오마주(존경)’로 써진 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드는 구절이 많다. 첫 희생자로 친아버지를 살해해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 오이디푸스를 떠올리게 하는 주인공은 아예 자신이 오이디푸스의 거울 이미지라고 선언한다. “오이디푸스는 무지에서 망각으로, 망각에서 파멸로 진행했다. 나는 정확히 그 반대다. 파멸에서 망각으로, 망각에서 무지로, 순수한 무지의 상태로 이행할 것이다.”(129쪽) 딸의 목숨을 노리는 주태를 살해하겠단 계획(미래)을 끊임없이 복기함으로써 잊혀져 가는 연쇄살인자(과거)로 돌아가려는 주인공의 노력을,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 ‘오디세이아’의 주인공 오디세우스가 망각에 맞서 싸우며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노력과 포개 놓은 부분도 그렇다.

치매가 진행되고 있는 인물의 독백이란 이 소설의 형식도 작가에게는 큰 도전이었다. “기억의 한계가 드러나기 시작하고 시야가 점점 좁아지는 인물의 입에서 나온 ‘잠언’ 같은 말들로 독자를 이끌어야 한다는 점이 정말이지 쉽지 않았어요. 하루에 한두 문장밖에 못 쓰는 날도 많아서 왜 하필 1인칭 시점으로 소설을 쓰려고 했나 후회하기도 했죠.”

독자에게 다소 허무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소설의 결말도 치매의 대표 증세인 ‘망상’이 모티브가 됐다. “치매 환자들은 무너져 가는 자신의 모습을 직시할 수 없어 망상 속에 가상의 적을 만들어 놓고 그와 싸우면서 견딘다고들 해요. 이 소설의 결말도 그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작가는 이번 작품을 2년 반 동안의 미국 체류를 마치고 돌아와 살고 있는 부산에서 썼다고 했다. “부산 분들의 말씨를 듣다 보면 짧으면서도 남성적인 느낌이 들어요. 집필을 마치고 읽어 보니 주인공 말씨가 부산 사람을 닮아있더군요. 어디에서 쓰느냐가 주인공의 말씨까지 변화시킨다는 것을 발견한 작업이기도 했습니다.”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
#살인자의 기억법#김영하#치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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