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시전상인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시골서 올라온 봇짐장사치들의 좌판을 걷어차고 쫓아내는 금난전권(禁亂廛權)을 휘두르는 소수의 특권층을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는 정조의 신해통공(辛亥通共·1791년) 이후에도 금난전권을 보장받은 육의전(육주비전) 상인에 국한해야 한다. 18세기까지 한양 도성에 살던 인구는 크게 관료, 군인, 상인과 그 식솔로 이뤄지는데 그 상인의 대다수가 시전상인이었기 때문이다.
최근 조선 영조 때 한양 도성 시전의 상소와 그에 대한 조처를 엮은 ‘시폐(市弊)’가 한글로 번역됐다. 1753년 작성된 시폐는 본디 총 3책이었는데 2책과 3책만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보존돼 있다. 시폐는 대동법 시행 이후 국가에 필요한 물품을 공급하는 상인이었던 공인(貢人)의 상소와 조처를 기록한 공폐(貢弊·전 6권)와 더불어 조선시대 후기 상업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시폐를 한글로 번역하고 해제를 단 조영준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의 도움을 받아 시전상인의 이모저모를 살펴보자.
―시전상인 수는 얼마나 됐나.
“한양 도성 인구를 20만으로 추정했을 때 시전상인의 수가 최소 1만은 됐을 것이고 식솔까지 포함하면 4만 이상은 됐을 것이다. 당시 상인은 시전상인과 공인밖에 없었고 도매상인 공인은 시전상인에 비해 훨씬 적었다. 시전상인은 당시 공인처럼 줄여서 시인(市人) 또는 시민(市民)이라 부르기도 했다. 공인은 자신들의 특권을 사고팔기도 했지만 시민은 이익이 크지 않았기 때문에 친인척이 물려받았다.”
―시전상인의 금난전권은 특권이 아니었나.
“대동법이 시행돼 공물을 쌀로 받으면서 다양한 물품에 대한 수요가 발생하기 전까지는 정당한 권리였다. 시전상인들은 궁궐 도배와 수리, 봉조(바느질), 도로청소의 국역이 있을 때마다 동원되는 대신 국가로부터 상품 전매권을 부여받은 국가공인 상인이었기 때문이다. 시전은 매번 국역이 있을 때 이를 100푼(分)으로 나눠 1∼10푼의 책임을 나눠 맡는 유푼전과 정해진 책임은 없지만 그때그때 동원되는 무푼전으로 나뉘는데 그 비율이 대략 반반가량 됐다. 육의전 상인은 7∼10푼의 부담을 짊어졌다.”
―그럼 난전으로 시전상인의 상권을 위협한 주체는 누구였는가.
“유력 관리와 군인들을 등에 업은 무뢰배가 대다수였다. 상설매장을 연 것은 아니었고 단기이익을 노리고 매판을 벌였다가 소기의 이익을 거두면 철수하는 식이었다. 시폐를 보면 이런 유력자를 등에 업은 난전에 대한 상소와 항의가 많다.”
―시전은 종로 운종가에만 몰려 있지 않았나.
“운종가는 대략 광화문우체국 동쪽부터 종로3가 입구 사이의 종로통을 말하는데 주로 육의전이 있었다. 비단 모시 면포 삼베 종이 건어물 모자 등 6∼8종류만 취급했다. 그 밖의 상품은 청계천 다리 부근과 동대문, 남대문 등 서울시내 곳곳에 설치된 다양한 시전에서 팔았다. 큰 시전은 여러 곳에 분점을 두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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