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은 신(神)을 향한 여정이었을까. 저항할 수 없을 것 같은 거대한 위용 앞에 선 왜소한 존재들. 도전할 수 없을 것 같은 대상에 도전하는 개인들은 살아 있음의 고통을 먼저 느껴야 했다. 그 고통 사이를 통과해 다다른 정점은 성취의 기쁨을 주었으나 그 순간은 매우 짧았다. 또 모두가 기쁨을 함께한 것은 아니었으니….
여대생 전푸르나 씨(24·서울시립대)는 세 겹으로 된 삼중화를 신었다. 장갑 세 개를 겹쳐 끼었다. 밖에는 어둠이 기다리고 있었다. 어둠. 한때는 히말라야 8000m급 14좌를 완등한 세계적 산악인 김창호 대장(44·몽벨 자문위원)조차도 무서워했던 어둠이다. 어둠은 불확실성을 상징한다. 그것은 무엇이 기다리는지 알 수 없는 데서 오는 공포다. 고산지대 단독 등반에 나선 등반가들은 이 어둠이 무서워 텐트 밖으로 나오지 못하곤 한다는 것이다. 때로는 이 공포를 이기지 못해 등반을 시도조차 못 하고 포기한 채 뒤돌아서는 등반가들도 있다. 이런 밤이면 김 대장은 텐트 속에서 혼자 일어나 앉아 미리 꾸려 두었던 가방을 풀어서 다시 꾸리며 시간을 보내거나 텐트 밖으로 나와 낮에 갈아 두었던 날카로운 피켈을 갈고 또 갈고는 했다. 그것은 공포를 이기기 위한 자기 다짐의 행위였다.
바람이 심한 곳이었다. 해발 7950m의 마지막 캠프. 바람은 몸을 흔들고 아무리 껴입었어도 전 씨의 손발은 시렸다. 5월 19일 오후 8시였다.
전 씨가 에베레스트(8848m)에 왔을 때 그를 처음 맞은 것은 거대한 텐트촌이었다. 이곳은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 기슭의 해발 5350m의 베이스캠프 지역. 전 씨의 눈에 비친 첫 풍경은 삭막함이었다. 초록은 없고 눈과 바위뿐이었다. 그곳에 수백 개의 텐트가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전 씨는 세계 최단 기간 히말라야 14좌 완등 및 세계 최단 기간 무산소 14좌 완등의 대기록에 도전하는 김 대장을 따라 이곳에 왔다. 김 대장은 서울시립대 산악부 출신이다. 전 씨는 서울시립대 산악부에서 활동하며 백두대간을 다녔다. 김 대장은 산악부 후배 중에서 체력이 좋은 전 씨를 데려왔다. 전 씨는 이번이 첫 해외 원정 등반이었다. 전 씨는 김창호, 서성호(34), 안치영(36), 오영훈 씨(35)로 이루어진 김창호 원정대의 유일한 여성 대원이었다.
김 대장과 서 대원은 인도에서부터 카약으로 156km, 자전거로 893km를 이동한 뒤 다시 걸어서 162km를 이동해 해발 5350m의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베이스캠프 일대에 형성된 텐트촌은 385명의 등반가와 1500여 명의 현지 셰르파로 북적였다. 셰르파들은 30∼40일 정도 등반대와 일하면 5000∼6000달러(약 555만∼669만 원)의 돈을 받는다. 네팔 카트만두에서의 일반인 하루 임금이 약 10달러(약 1만1000원)인 데 비하면 매우 높은 소득이다.
여성인 전 씨의 눈에 먼저 비친 점은 이들이 씻지 않고 지낸다는 것이다. 물이 귀했다. 1주일에 한 번 정도 빙하 주변에 고인 물을 떠온 뒤 끓여서 샤워를 한다. 찬물로 몸을 씻는다거나 찬물을 마시는 것은 금기 사항이다. 체온이 떨어지면 몸 상태가 좋지 않게 될 수 있고 고소증세도 더 빨리 찾아온다는 것이다. 빙하 주변에서 물을 떠 온 뒤 통에 담아 두고 흙을 가라앉힌 뒤 그 윗물을 떠서 끓인 다음 이를 다시 한번 체로 걸러서 음식을 했다. 김 대장 일행은 음식을 담당하는 셰르파를 고용했다. 두르바라고 불린 40대의 이 사내는 히말라야에서 실종된 한국의 대표적 산악인 고 박영석 대장과 여러 차례 활동한 인물이다. 특히 짬뽕을 잘 끓이고 한국 음식을 잘하는 사람이다. 음식 재료와 의약품은 안 대원이 준비해 왔다. 한국에서 젓갈류 등 200kg의 밑반찬을 실어 왔고, 나머지 필요한 재료는 현지에서 조달했다. 한 끼에 7, 8가지의 반찬이 나오는 풍성한 산 위의 밥상이었다.
낭만적인 며칠은 본격적인 고난에 앞선 짧은 휴식일 뿐이었다. 정상을 오르기 위해 베이스캠프에서 해발 6050m의 캠프1, 해발 6450m의 캠프2, 해발 7080m의 캠프3, 해발 7950m의 캠프4로 차례로 이동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전 씨의 손발은 차가워졌고 그는 속으로 동상을 걱정했다. 새벽에 일어나 이동하느라 잠도 부족했다. 산소가 희박하고 바람이 거센 고산지대에서는 잠도 잘 오지 않았다. “너무 너무 졸렸습니다.” 잔 실수도 많았다. 장비를 조작하는 데 서툴렀다. 이럴 때마다 서 대원이 말없이 그를 도와주었다. 남을 잘 배려하는 서 대원에게 전 씨는 많이 의지했다. 실수할 때마다 김 대장에게는 무서워서 차마 말하지 못해도 서 대원에게는 몰래 이야기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베테랑 서 대원은 문제를 척척 해결해 주었다. 또 동료들에 비해 체력이 약한 전 씨가 뒤처질까 서 대원은 일부러 전 씨의 뒤를 따르며 보살펴 주었다.
서 대원은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 12개를 오른 한국의 차세대 등반가다. 전 씨를 만난 건 이번이 처음이다.
마지막 정상 등정에 나서기 직전. 오후 8시에 출발해 꼬박 밤을 새우며 걸어야 했다. 다음 날 오전 10시가 넘으면 날씨가 나빠지기 때문에 그 전에 도착해야 했다. 서 대원이 전 씨의 복장과 장비를 다시 점검했다. 그때 서 대원이 전 씨의 장갑 하나가 부족한 걸 발견했다. 마지막 봉우리 부근에서 바꿔 껴야 할 가장 두꺼운 장갑이었다. “그 장갑이 없었다면 워낙 손발이 시렸던 저는 다시 내려와야 했을 거예요.”
“그 장갑 어딨느냐?”라는 물음에 전 씨는 자신이 장갑을 가방에 챙겨 넣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장갑을 다른 곳에 두고 온 것이었다. 전 씨는 그곳에 가서 다시 장갑을 챙겨 왔다. 서 대원은 그 장갑을 직접 전 씨의 외투 품속에 넣어 주었다.
일행은 일제히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전 씨는 처음엔 서 대원과 함께 걸었다. 산소마스크를 쓰고 올라가는 전 씨에 비해 산소통 없이 무산소 등정을 하던 서 대원이 뒤처지기 시작했다. 서 대원이 자꾸 뒤처지자 전 씨는 뒤를 돌아보았다. 랜턴 불빛 속에 그의 얼굴이 흘낏 비쳤다. 사실상 전 씨가 가까이서 본 서 대원의 마지막 표정이었다. 무산소 등정으로 인한 호흡곤란과 체력 저하 속에서 그의 표정은 복잡했다. “함께 보조를 맞춰 주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것 같았어요. 잊혀지질 않아요 그 표정이….” 길은 외줄기였다.
바람이 거세 눈과 모래가 계속 전 씨의 고글 속으로 파고들었다. 떨면서 산을 오르는 도중 날이 밝았다. 5월 20일 오전 8시경 전 씨는 에베레스트 정상에 섰다. 한국 여성으로는 9번째였다. 1993년 5월 10일 김순주, 최오순, 지현옥 3명이 한국 여성으로는 최초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랐다. 전 씨는 당시 22세이던 김 씨에 이어 한국 여성 역대 두 번째 최연소로 에베레스트를 오르는 기록도 세웠다. 그러나 기력이 없어서 사진 찍을 힘도 없었다. 감격의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지상의 꼭대기에는 신에게 가까이 가려는 인간의 염원으로 가득했다. 룽다와 타르초가 바람에 펄럭였다. 룽다와 타르초는 불경을 적은 깃발이다. 바람에 날려 신의 말씀이 세상 멀리 퍼지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 누군가 가져다 놓은 성경책도 있었다.
그때 두 팔이 없는 장애인이 셰르파 4명의 도움을 받으며 에베레스트 정상에 올라왔다. 셰르파 4명은 전원 무릎을 꿇고 고글을 벗은 뒤 일제히 그 남자와 하늘에 절을 올렸다. 정작 그 장애인은 울지 않았는데 셰르파들은 모두 울고 있었다. 전 씨의 눈물이 흐르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그것은 생의 의지에 대한 감격이었을까. 알 수 없는 눈물이 전 씨의 뺨을 타고 흘렀다. 거대한 산군의 위용 앞에서 전 씨는 “처음으로 이 세상에 신이 존재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곧 이어 산소마스크를 쓰지 않은 김 대장이 올라왔다. 무표정한 김 대장은 산악 기계처럼 움직였다. 그러나 이때 “몽롱한 상태였고 구름 위를 걷는 듯했다”고 김 대장은 회고했다. 에베레스트보다 약 230m 낮은 K2(해발 8611m)를 올랐을 때만 해도 정상에서 담배까지 피우던 그였다. 그러나 그 200여 m의 차는 그의 몸에 큰 차이를 일으켰다. 그런 몽롱함 속에서 사소한 실수는 곧 죽음으로 이어질 수 있다. 세계적인 대기록을 세운 이 강철 같은 사나이는 너무 힘들어서 내려올 때 옷을 입은 채로 오줌을 누었다고 고백했다.
모두가 지친 상태였다. 무산소로 올라온 서 대원이 가장 늦게 정상에 올라왔을 때 김 대장과 전 씨는 이미 정상에서 내려간 상태였다. 기진맥진 캠프4로 되돌아온 전 씨는 주변의 부산한 움직임에 잠에서 깼다. 무언가 잘못된 듯했으나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전 씨는 이때 앞을 볼 수 없었다. 눈에 반사된 태양광에 시달려 설맹 증세가 온 것이다. 안구는 부어올랐고 눈이 떠지지 않아 반장님 상태였다. 텐트 밖으로 나가 보려 했지만 앞이 안 보여 나갈 수가 없었다. 탈진한 서 대원은 옆 텐트 안에서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전 씨는 앞이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그의 죽음을 맞았다.
김 대장은 서 대원에게 “어서 깨어나 가자”고 했다. 두 시간이나 서 대원의 입에 숨을 불어넣었다. 그래도 깨어나지 않자 김 대장은 대원들에게 내려갈 준비를 시킨 뒤 몇 시간 동안을 혼자 깊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히말라야 8000m급 봉우리 10개를 함께 올랐던 최고의 동료를 그는 그렇게 보냈다.
전 씨는 “대원들 중 누구도 성호 형이 죽었다는 말을 하지 않았어요”라고 했다. 그것은 죽음을 맞는 그들의 방식이었다. 그들에겐 그의 몸만이 죽었을 뿐이다. 서 대원은 네팔 현지에서 화장됐다.
김 대장은 “만일 죽음이라는 것이 또 다른 공간에 있는 것이라면 성호는 그 또 다른 공간을 탐험하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텐트 안에서 서 대원이 숨진 것을 발견한 안 대원은 “그가 추구했던 정신을 가슴에 담겠다”고 했다. 그의 정신. 그것은 함께 만든 그들의 정신이기도 했다. 그것은 불확실성에 맞서는 용기와 도전이다. 어쩌면 혼자서는 마주하기 힘들었던 어둠을 그들은 함께 뚫고 걸었다. 함께했던 순간들의 그 기억은 용기가 되어 그들의 내면에 자리 잡았다.
안 대원은 새로운 등반 계획을 세우고 있으며 김 대장은 산악인들을 지원할 수 있는 보험제도를 만들거나 기금을 조성할 구상을 하고 있다. 전 씨는 말했다. “시간이 흘러도 이 등반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이제는 남은 인생에서 무얼 해도 열심히 할 것”이라고. 살아남은 자들의 슬픔은, 삶에 대한 의지로 바뀌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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