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예술]웃음폭탄 영감님, 세계사 주무르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7월 27일 03시 00분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
요나스 요나손 지음·임호경 옮김/508쪽·1만3800원/열린책들

열린책들 제공
열린책들 제공
예전에 한 친구가 “내 증조할아버지는 서울에서 거짓말이 열 말쯤 내려오면 일곱 말은 자기가 갖고 세 말은 이웃에게 나눠 줄 정도로 ‘구라’(거짓말)가 셌다”고 한 적이 있었다. 이 책은 그런 구라에 기꺼이 눈과 귀를 빌려 줄 준비가 돼 있고 그 구라를 즐길 마음의 준비가 된 독자를 위한 책이다. 오죽하면 작가가 책의 서두에 자신의 재담 넘치는 할아버지가 들려준 얘기에 “그게, 진짜 정말이에요?” 하고 물으면 “진실만 얘기하는 사람은 내 얘기를 들을 자격이 없단다”라고 응수했다는 일화를 소개했을까.

스웨덴의 한 양로원에서 100세 생일을 맞은 알란 칼손은 양로원 직원들이 열어주기로 한 생일파티를 불과 한 시간 앞두고 양로원 창문을 넘어 탈출한다. 매일 똑같은 일정과 규칙을 지키며 죽는 날만 기다리며 사느니, 객사하더라도 실컷 돌아다니는 편이 훨씬 의미 있다고 생각한 것. 이 책은 양로원을 탈출해 우연히 갱단의 마약 판매 대금이 든 가방을 손에 넣은 칼손, 그 뒤를 쫓는 갱단과 경찰의 추격전을 그린 ‘현재’와, 13세 나이에 다이너마이트 공장에 취직한 것을 계기로 유럽과 아시아, 북미 등 전 세계를 종횡무진 누비는 칼손의 ‘과거’가 교차하며 서로를 향해 수렴해 나아간다.

평범한 인물이 세계사의 결정적 순간마다 등장해 그 흐름을 바꿔놓는다는 이 책의 설정은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 ‘포레스트 검프’(1994년)를 닮았다. 폭약 전문가라는 이유로 스페인 내전에 휘말린 칼손은 우연한 기회에 독재자 프랑코의 생명을 구하는가 하면, 미국에 흘러들어서는 2차 대전을 종식시킨 원자탄 개발 과정에 공을 세우고 트루먼 대통령의 친구가 되기도 한다. 중국의 국공 내전 와중에 미국에 도움을 청하러 온 국민당 총통 장제스의 부인 쑹메이링과 함께 중국으로 건너와 국민당 군대에 붙잡힌 마오쩌둥의 네 번째 부인 장칭(훗날 문화대혁명을 주도)을 탈출시키기도 한다. 영국 총리 처칠이 폭탄 테러에 숨질 위기를 피한 것도, 미국과 소련이 핵무기 감축 협상에 들어간 것도 그 뒤에는 ‘보이지 않는 손’ 칼손이 있다.

국내 독자에겐 칼손이 6·25전쟁이 한창인 한반도에서 김일성 김정일 부자를 만나게 되는 대목이 특히 흥미로울 것 같다. 소련 스탈린의 심복으로 변장해 김일성과 면담하려던 칼손의 계획은 소년 김정일의 의심을 사게 되지만, 다행히 김정일이 모스크바에 확인 전화를 걸기 직전 스탈린이 급사하면서 들통 나는 걸 피한다. 훗날 김정일이 죽는 날까지 누구도 신뢰하지 않게 된 이유가 칼손의 정체가 가짜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됐기 때문이라는 이 책의 능청스러움은 500쪽이 넘는 두꺼운 책을 계속 붙잡고 있게 만드는 힘이다.

15년간 기자로 일하고 미디어 회사의 대표까지 지낸 저자 요나스 요나손이 지난 100년의 현대사를 칼손이라는 바늘로 꿰어내는 솜씨는 능숙하다. 스페인과 중국의 내전, 미국과 소련의 원자탄 개발 경쟁과 냉전, 6·25전쟁과 프랑스 68혁명까지 중립적이고도 해박한 요점 정리도 수준급이다. 칼손의 여정을 관통하는 묵직한 주제를 기대했다면 다소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그런 독자에게는 칼손의 어머니가 어린 그에게 들려줬던 얘기를 되풀이하고 싶다. “세상만사는 그 자체일 뿐이고, 앞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 자체일 뿐이란다.”

우정렬 기자 passion@donga.com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노인#세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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