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을 거닐다 보면 국보 제224호인 경회루(慶會樓) 주위에 왠지 낯선 정자 하나가 눈에 띈다. 경회루를 둘러싼 연못가 서북쪽에 세워진 이 육각정의 명칭은 하향정(荷香亭). ‘연꽃 향기’라는 아름다운 뜻이 담긴 소담한 건물이다.
하지만 이 향기는 정확히 말하자면 ‘조선의 향취’는 아니다. 경복궁을 태조 4년(1395년) 처음 건립했던 때에도, 고종 4년(1867년) 흥선대원군이 중건했던 시기에도 궁궐 내에 하향정이란 정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하향정은 1949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에 새로 지은 정자다. 조선을 대표하는 궁궐에 이런 정자가 왜 만들어진 것일까.
최근 한 시민단체가 이 정자의 철거를 주장하고 나서면서 일반인에게는 존재 자체도 생소했던 하향정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지난달 문화재제자리찾기(대표 혜문 스님)는 문화재청을 상대로 “경복궁의 원형을 보존 복원하기 위해 하향정을 철거해야 한다”는 요지의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문화재제자리찾기에 따르면 이 하향정은 당시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지시로 세워진 건물이다. 당시 이 대통령이 낚시를 하며 휴식을 취할 목적으로 정자를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세간에는 1950년 6·25전쟁이 터진 날 오전에도 여기서 낚시를 즐기다 북한의 남침에 대한 첫 보고를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혜문 스님은 “대통령이 사사롭게 자신의 취미생활을 위해 지은 건물을 경복궁 내에 그대로 유지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말했다.
학계에서도 이런 주장이 나름의 근거가 있다고 보고 있다. 문화재청의 건축문화재분과 문화재전문위원인 김왕직 명지대 건축학과 교수(52)는 “원론적으로만 따진다면 철거하는 게 이치에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공식적으로 문화재청은 경복궁을 복원 유지하는 기준 시점을 ‘고종 중건’ 때로 잡고 있다. 그렇다면 건립 의도의 좋고 나쁨을 떠나서라도 기준에 적합하지도 않은 건물을 고수할 이유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꼭 철거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들이 많다. 김 교수는 “모든 사안에 엄중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며 “하향정이 세워진 것도 결국 좋건 싫건 우리의 역사인데 무조건 없애는 게 능사는 아니다”고 말했다. 사적분과 문화재전문위원인 황평우 육의전박물관장(52)도 “교육적 측면에서 하향정을 존치하고 그에 얽힌 역사를 정확하게 가르치는 방법도 있다”고 말했다.
문화재청은 다양한 의견이 공존하는 만큼 앞으로 여러 전문가의 의견을 더 많이 청취하겠다는 입장이다. 일각에서는 굳이 논란을 야기하는 경복궁에 둘 것이 아니라 충남 부여군에 있는 한국전통문화대학교로 옮겨 보존하는 방법도 고려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박영근 문화재청 문화재활용국장은 “유지와 철거 한쪽으로 단정 지을 게 아니라 제3의 대안까지 폭넓게 논의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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