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연과학]역사왜곡 日, 왜 스스로 집단최면에 빠졌을까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3일 03시 00분


“속고 속이는 것은 진화의 산물… 더 잘 속이기위해 자신도 속인다” 진화생물학자의 도발적 통찰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
로버트 트리버스 지음/이한음 옮김/576쪽·2만8000원/살림

자기기만이 좋은 면도 있다. 자신감을 높이고 삶을 긍정적으로 보게 만든다. 진화생물학에서도 자기기만에 탁월한 생물이 경쟁에서 이길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러나 과도한 자기기만은 조롱거리가 되거나 사회에서 배척당하는 지름길이다. 살림 제공
자기기만이 좋은 면도 있다. 자신감을 높이고 삶을 긍정적으로 보게 만든다. 진화생물학에서도 자기기만에 탁월한 생물이 경쟁에서 이길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그러나 과도한 자기기만은 조롱거리가 되거나 사회에서 배척당하는 지름길이다. 살림 제공
● “자기 기만이라는 질병은 모든 인류 집단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며, 어느 누구도 이 병에 면역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하지만…”    
    
애인이 있는데 잠깐 다른 남정네나 여인네에게 마음이 혹했다 치자. 그런데 달콤한 연인께서 재까닥 눈치 채고선 심문에 돌입했다. 자, 이 순간 순순히 털어놓고 용서를 구한다면 이야기는 아름다운 풍속의 전형이 될 터. 하나 우리 인생사가 어디 그런가. 뭔 소리냐, 날 그렇게 못 믿나, 오해다 착각이다…. 회유와 설득, 하소연과 강요가 난무한다. 목표는 상대방에게 속내를 들키지 않는 것. 하나의 ‘기만(欺瞞) 행위’가 시작된 셈이다.

이 기만의 핵심은 얼마나 완벽하게 애인을 속여 넘기느냐는 것. 뻔히 표정에서 티가 나고, 목소리가 갈라지는 어설픈 거짓말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그러려면 자신부터 속여야 한다. 난 한눈판 적 없다, 그 사람은 친한 동료일 뿐이다. 그렇게 스스로 세뇌시키다 보면 어느 순간 ‘진짜로’ 그런 일은 없었다고 믿게 된다. 확신이 섰나. 그럼 이제 다시 재판관 앞에 서 보라. 오직 진실만을 대변하는 당신의 눈과 입. 축하한다. 당신은 드디어 ‘자기기만(self-deception)’의 무대에 올랐다.

‘우리는 왜…’는 미국 럿거스대의 인류학·생명과학 교수인 저자(70)가 이러한 ‘기만과 자기기만’의 메커니즘을 진화생물학으로 풀어 낸 책이다. 솔직히 책 겉장에 있는 소개처럼 이 양반이 ‘살아있는 최고의 진화생물학자’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저런 자료를 뒤져 보니 ‘이기적 유전자’(리처드 도킨스 지음)를 비롯한 여러 진화생물학 연구에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인물이란다. 그렇게 대단한 학자의 책이 국내에 처음 소개된다는 게 더 놀랍다.

어쨌건 도킨스가 “여태껏 그가 내놓은 개념 가운데 가장 도발적이면서 흥미로운 주제”라고 평가한 이 책은 속고 속이는 행위가 바이러스부터 사람까지 모든 생물 영역에 산재해 있는 자연선택의 산물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리고 상대방을 속여야 이득을 얻고 그 속임수를 간파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진화의 정글에서, 자기기만도 아울러 ‘기만에 봉사하도록, 즉 남을 더 잘 속이기 위해’ 발전했다.

로버트 트리버스
로버트 트리버스
저자에 따르면 자기기만은 이런 진화 시스템에서 효율성을 배가시켜 주는 매력적인 기제다. 자신마저 속임으로써 그 행위를 할 때 스스로 가질 수도 있는 내부적 모순(혹은 부담)을 덜어주고, 또 속임수가 들통 났을 때 비난에 대처하는 손쉬운 방어 수단을 제공한다. ‘난 모르고 한 거예요’라고 하면 그만이니까. 게다가 이 시스템은 좀 더 나가서 ‘강요된(imposed) 자기기만’까지 만들어 냈다. 부모가 자식에게 ‘너 잘되라고 이런다’며 강요하는 일을 자식도 어느 순간 ‘나 잘되려고’ 하는 것으로 인식한다는 것처럼.

사실 생태계에서 기만 행위는 익숙한 풍경이다. 포식자가 먹이를 얻기 위해, 피식자가 살아남으려고 속임수를 쓰는 건 흔하다. 그런데 우리가 깨닫지 못했을 뿐이지, 자기기만도 그만큼 비일비재하다. 위기에 처한 고양이가 온몸을 곧추세우고 몸집을 부풀리는 것도 자기 스스로 더 크고 세질 수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상대에게 먹히지 않는 자기기만이다.

이런 사례도 있다. 농어목 검정우럭과의 민물고기인 블루길 중에는 번식을 위해 암컷과 똑같은 모양새를 가진 수컷이 존재한다. 같은 수컷이었다면 힘센 수컷에게 쫓겨났을 영역에서 암컷인 척 머물다가 몰래 진짜 암컷과 수정하는 것이다. 재밌는 것은 암컷은 둘 다 수컷이란 걸 알면서도 ‘다다익선’이니 모르는 척 눈감아 준다. 기만과 자기기만이 뒤섞인 ‘웰 메이드 막장 드라마’다.

인간 사회도 비슷하다. 한 장(章)을 할애해 설명하는 대표적 자기기만은 ‘거짓 역사 서사’다. 자국 역사를 찬미하고 정당화하려는 집단적 자기최면을 말한다. 거짓 역사 서사는 어느 시대 어느 국가에나 존재하지만, 저자가 꼭 집어 낸 일본은 그 도를 넘어섰다. “지난 10년 사이에 일본이 자신의 과거를 대하는 방식에서 아주 흥미로운 퇴행 현상이 나타났다. 이전에는 이따금 인정하고는 했던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이제는 부정하고 있다. 산더미 같은 증거들을 외면한 채 말이다. 정반대의 증거가 폭로될 때마다 부정하는 자들은 꼬리를 좀 내리지만, 역사적 범죄에 공식적으로 연루됐다는 평가를 최소화하려는 의도를 늘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은 과학책인데도 어느 순간 인문서를 읽는 듯한 묘한 착각을 안겨 준다. 저자가 8장부터 책의 반가량을 인류의 기만과 자기기만을 보여주는 데 할애했기 때문이다. 때론 본말이 전도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하지만 마지막 14장 ‘우리 자신의 삶에서 자기기만과 싸우기’에 당도하면 왜 이리도 인류에 천착했는지 그 해답을 들을 수 있다. “기만과 자기기만이라는 질병은 모든 인류 집단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며, 어느 누구도 이 병에 면역성을 지니고 있지 않다. 하지만 자신이 알아차린 편향을 스스로 의식적으로 교정하는 것은 가능하다. 과신과 무의식을 피하려고 노력하라. 둘 다 저마다 위험하다. 그리고 둘이 결합되면 치명적일 수 있다.”

도킨스의 말처럼 이 책은 참 도발적이다. 과학자가 기만과 자기기만을 진화의 산물로 설명해 놓고 또 이를 극복해야 할 과제로 상정한다. 물론 저자는 이를 완전히 없앨 수도 없고, 잘만 통제하면 순기능도 상당하다는 전제를 깔긴 했다. 하지만 이 모순적 테제를 어찌 받아들여야 할까. 잠깐, 혹시 이것도 일종의 기만과 자기기만 아닐까. 내용이 어려워 덮은 과학책은 많으나 겨우 다 읽었는데 머리를 싸맨 경우는 처음이다. 아, ‘바보들의 바보짓(책의 원제·The Folly of Fools)’은 기자를 두고 한 말인가.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우리는 왜 자신을 속이도록 진화했을까?#로버트 트리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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