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는 1년째 적군에 포위되어 있었습니다. 보급로는 막혔고 사람들은 비둘기나 생쥐, 벌레 한 마리까지 눈앞을 스쳐가게 놓아두지 않았습니다. 해골처럼 마른 사람들이 거리에 쓰러져 죽어갔습니다.
그런 거리에 포스터가 붙었습니다. “악기를 연주할 수 있는 음악가 동무들은 모이시오!” 앙상한 얼굴로 악기를 든 동료들과 얼싸안으며 연주가들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연습은 잘 되지 않았습니다. 활을 든 손이 사정없이 떨렸고 관악기를 불 힘이 나지 않았습니다.
몇몇 연주가들이 “힘을 아껴뒀다 본 공연 때 써야 되지 않겠소?”라고 항변했습니다. 지휘자가 “연습 없이는 배급 없다”고 하자 연습은 재개됐습니다. 1942년 8월 9일, 쇼스타코비치(사진) 교향곡 7번 ‘레닌그라드’의 레닌그라드 시 초연은 도시 전체와 소련 전역에 생중계됐습니다.
1941년 나치의 소련 침공과 레닌그라드 공방전을 그린 이 작품은 여러 면에서 독특합니다. 특히 1악장은 한 번 들으면 잊을 수 없습니다. 라벨의 ‘볼레로’처럼 단순한 리듬 속에 단순한 주제가 계속 반복되면서 변주됩니다. 음량이 커지면서 작은북이 기관총의 기총소사 같은 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금관의 빙빙 도는 반음은 전폭기의 공습을 연상시키죠. 엄청난 음향, 엄청난 소음이라 할 만합니다.
그런데 의문점이 있습니다. 과연 쇼스타코비치는 이 작품을 통해 히틀러의 비인간적인 폭력만 그린 것일까요. 1980년대 후반 소련에서 글라스노스트(개방)가 진행되면서 다른 증언들이 줄을 잇기 시작했습니다. 이 작품은 나치 침공이 일어나기 전부터 이미 쓰이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쇼스타코비치 생전의 지인이 작곡가에게 작품의 뜻을 묻자 그는 “이 곡이 단지 파시즘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우리 조국(소련)에 만연한 잔학한 독재와 반인간성에 대한 것이라고 털어놓았다”고 회상했습니다.
전체주의 체제 속에서 살았던 쇼스타코비치가 예술적 양심을 지키면서 생존했던 비결은 음악적 중의법(重義法) 또는 이중어법을 활용하는 것이었습니다. 공산주의 혁명의 승리를 그린 것으로 비쳐 공식매체의 찬양을 받았던 교향곡 5번의 4악장도 그렇습니다. 승리를 그린 피날레 같지만, 작곡가 자신은 이렇게 말했다는 것이 지인들의 증언입니다. “잘 들어봐. 등에 칼을 대고 ‘앞으로 가, 웃어!’ 이렇게 말하는 것 같지 않은가?”
땅에 묻힌 지 오래인 볼셰비즘을 새삼 고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술가는 어느 때나 권력의 요구에 복종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누가 승자인지는 한참 지난 뒤 가려질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blog.daum.net/classicgam/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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