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파주시 광탄면에 있는 수길원(綏吉園)은 한여름에도 쓸쓸함이 묻어나요. 영조의 후궁이던 정빈 이씨의 묘인데요. 묘 앞 전각도 터만 남고, 주위 땅은 푹푹 꺼져 있습니다. 열 살 때 숨진 친아들 효장세자(사도세자의 이복형)는 정조의 양아버지가 되는 바람에 진종(眞宗)에 추존됐지만, 친할머니는 아니라서 그럴까요. 왕의 할머니로 위패는 칠궁(七宮)에 모셔졌건만, 정작 묘는 허름하기 짝이 없습니다.”
한번 얘기를 꺼내기가 무섭게 홍미숙 수필가(54)는 입이 마를 새가 없었다. 최근 출간된 ‘왕 곁에 잠들지 못한 왕의 여인들’(문예춘추사)은 조선 왕비의 무덤인 능(陵)과 왕을 낳은 후궁의 무덤인 원(園), 다른 후궁들의 무덤인 묘(墓) 등 도합 49곳에 얽힌 흥미진진한 사연을 소개했다. 1995년 수필 ‘어머니의 손’으로 등단해 수필집 6권을 내놓은 중견 수필가가 이 책에서 처음으로 역사유적답사기에 도전했다.
“2011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문학창작기금 2000만 원을 받았습니다. 과분한 일이었죠. 그런데 당시에 그간 수필로 독자들에게 위안은 줬지만, 정보를 주진 않았다는 고민이 컸어요. 그때 머리나 식힐 겸 서오릉에 갔는데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와 후궁인 희빈 장씨의 묘가 함께 있잖아요. 왠지 모를 처연함이 느껴져 자료를 뒤지다가 제대로 공부해보자 싶어 뛰어들었죠.”
막상 시작은 했지만 작업은 쉽지 않았다. 여성작가로서 왕비와 후궁에게 초점을 맞춘 것까진 좋았는데, 글을 써내려 갈수록 깊이 있는 분석이나 적확한 감상을 짚어내는 일이 녹록지 않았다. 그럴 때면 무조건 다시 능을 찾았다. 서오릉은 10번 이상 찾았다고 한다.
그러다 올해 봄 경기 구리시 동구릉(東九陵)에 갔을 때였다. 지난해 겨울에는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 무덤이 그리도 애잔해 보이더니, 별꽃 봄맞이꽃 제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 참으로 아름다웠다. 홍 작가는 “자연도 능도 그대로인데 조석으로 바뀌는 건 내 눈과 마음이란 걸 깨달았다”며 “큰 욕심 내지 말고 머리나 식히려던 초심 그대로 편안한 ‘길 안내서’를 내기로 했다”고 했다.
요즘 홍 작가는 기분이 상쾌하다. 힘든 경험이었지만 수필을 쓸 땐 몰랐던 충만감이 가득하다. 다음 책도 조선 왕비를 다룰 예정이란다. 왜 유독 왕비에게 꽂힌 걸까. “TV드라마 때문인가 봐요. 농담이 아니라 워낙 사극에서 왕실을 많이 다루잖습니까. 친숙하고 흥미 가는 것부터 찾아보는 게 진짜 공부 아닐까요. 역사를 열심히 공부하면 수필도 더 풍성해지리라 확신합니다. 그 속엔 사람 사는 얘기가 무궁무진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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