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하고 소심한 재수생 강지용. 고위 공직자 아버지, 영어 유치원 원장인 어머니, 의대생 형, 미국 뉴욕 비즈니스스쿨에 다니는 누나…. 반들반들 빛나야 하는 이 가족에서 지용은 유일한 흠이다. 엄마는 싸늘하기만 하다. “대통령 자식이라도 대학이 삼류면 평생 삼류 꼬리표 달고 사는 줄 왜 몰라.”
점쟁이가 찍어 준 재수학원을 다니는 지용은 껍데기뿐이다. 생기 없는 두 눈에는 아무것도 담기지가 않는다. 웃고 있는 것들은 모두 경멸의 대상이다. ‘입시’라는 단어가 온 사방에서 사정없이 달려드는 싸늘한 세계에서 지용은 숨 쉴 틈이 없다. 재수학원 옥상에서 담배를 피우는 순간이 일탈의 전부다.
무기력한 지용은 학원에서 민신혜를 만나면서 변하기 시작한다. 술집 주인인 엄마의 강요로 열한 살 때부터 성매매를 했다는 신혜. 지옥 같은 가족으로부터 신혜를 구하기 위해 지용은 신혜의 엄마를 살해한 뒤 강도의 소행으로 위장하고 미국으로 도피성 유학을 떠난다.
지용은 “어쩔 수 없지. 악을 없앨 방법은 악밖에 없는걸. 죽느냐 죽이느냐, 둘 중 하나라고”라며 살인에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신혜 엄마의 얼굴에서 자신의 어머니를 본다. 실상은 자신을 ‘공부 기계’로 몰아붙이기만 하는 엄마를 없애 버리고 싶은 욕망을 대리 충족한 것이다.
뉴욕에 있는 누나의 집에서 지용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암호로 신혜와 소통하지만, 그 가느다란 연결은 어느 순간 단절돼 버린다. 사라져 버린 신혜를 홍콩 침사추이까지 뒤쫓으면서 지용은 새로운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신혜를 향한 무한한 사랑과 신뢰는 순식간에 일그러진 배신으로 채워진다.
이야기는 물기 하나 없이 건조하다. 세상살이의 주름진 구석구석을 들추고 끄집어내 불편하게 만든다. 주인공들의 너절한 삶도 마지막 장까지 변함이 없다. 이 소설은 욕망을 향해 거침없이 손을 내뻗고, 스스로를 정당화하거나 비하하며 살아가는 이 세상의 모든 인생을 비추는 거울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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