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우영의 영화와 심리학]감시자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16일 03시 00분


눈뜨고 집중해도 다 못보는데, 하물며 운전중 통화하면…

지하철 2호선에 탄 목표물을 감시하는 임무를 수행하던 하윤주(한효주). 그녀는 40대 후반의 아저씨 차림을 한 목표물의 일거수일투족을 빠짐없이 기억해 낸다. 목표물의 인상착의, 그가 타고 있던 지하철의 객차 번호, 지하철에서 벌어진 사건과 거기에 있었던 사람들의 얼굴, 목표물의 동선과 그가 움직인 정확한 시간, 거기에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번호부에 메모를 하던 목표물의 필압까지 확보해 둔다.

글자가 지워진 신문

하윤주가 초능력에 가까운 기억력으로 자신이 본 것들을 나열하고 있을 때, 갑자기 감시반의 황 반장(설경구)이 묻는다. 목표물이 들고 있던 신문에는 뭐가 쓰여 있었냐고. 마치 감시카메라에 찍힌 장면을 보면서 목표물의 움직임에 대해 설명해 주는 것 같던 하윤주가 멈칫거린다. 목표물이 지하철에서 쇼핑백을 든 여자와 부딪히면서 가지고 있던 신문을 떨어뜨리는 것을 분명히 봤는데…. 다시 한 번 차분하게 기억을 더듬어 본다. 지하철에서 봤던 것들을 하나씩 지워 가면서 신문에 대한 기억으로 접근하기 시작한다. 드디어 그녀의 기억 이미지 속에 있던 모든 대상은 지워지고 신문만 남는다. 이제 신문의 내용을 읽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그녀의 기억이 보여준 것은 글자가 다 지워진 신문지뿐이었다. 하윤주의 기억에는 신문의 기사 제목이나 내용은 입력되지 않았던 것이다. 바로 그때 황 반장이 소리친다. “부주의 맹시!”

조의석, 김병서 감독이 공동 연출한 2013년 개봉작 영화 ‘감시자들’의 주인공은 경찰청 특수조직인 감시반 요원들. 이들의 임무는 범죄자를 감시하고 추적하는 것이다. 물론 일반 경찰들도 동일한 임무를 수행한다. 하지만 감시반의 목표물은 초강력범들이다. 3분 만에 은행을 털고, 특검 조사 대상의 서류를 탈취하면서 단서 하나 남기지 않는 무장 범죄조직이 감시반의 상대다.

감시반이 사용하는 무기 역시 일반 경찰들이 사용하는 것들과는 사뭇 다르다. 감시반의 본부는 최첨단 기기를 활용해서 감시반을 지원하지만, 현장 요원들은 자신들의 눈과 머리를 무기로 사용한다. 스스로를 노출시키지 않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으로 말이다.

요원들의 관찰력은 감시카메라도 놓치는 범인을 찾아낼 정도로 뛰어나다. 놀라운 것은 이들의 기억력이다. 마치 사진을 찍듯이, 자신의 곁을 스쳐 지나간 사람들의 미세한 부분까지도 놓치지 않고 기억해 낸다. 보고 기억하는 능력은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지만, 감시반이 현장에서 사용하는 관찰력과 기억력이라는 무기의 성능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는 사람은 경찰대를 갓 졸업하고 감시반에 선발된 하윤주다. 그런 하윤주도 목표물이 가지고 있던 신문의 내용은 기억해 내지 못한 것이다. 부주의 맹시(inattentional blindness) 때문에.

우리는 눈뜬장님이 될 수 있다

부주의 맹시는 우리가 특정 대상에 주목할 경우 다른 대상을 지각하지 못하는 심리적 현상을 일컫는다. 황 반장은 하윤주가 목표물의 움직임에만 모든 신경을 기울이다 보니 신문에는 제대로 주의하지 않았고, 그 결과 신문 내용은 기억하지 못했다고 지적한 것이다. ‘감시자들’은 어쩌면 우리나라 경찰이 최신 심리학 개념을 외치는 장면이 나온 첫 번째 영화로 기억될지도 모른다. 하윤주처럼 엄청난 기억력의 소유자에게는 이 정도도 부주의 맹시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보통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부주의 맹시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는다.

농구공을 주고받는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한 사람이 고릴라 복장을 하고 이들 사이를 천천히 지나갔다고 생각해 보자. 정상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고릴라 차림을 한 이 사람을 못 볼 수 있을까? 하버드대 심리학과의 대니얼 사이먼스와 크리스토퍼 차브리스가 학술지 ‘지각(Perception)’에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답은 ‘그렇다’이다.

이들은 3명씩 한 팀으로 구성된 사람들이 서로 농구공을 패스하는 영상을 보여주었다. 실험 참여자들의 과제는 두 팀 중 한 팀의 구성원들이 몇 번 공을 주고받는지 세는 것이었다. 패스를 주고받는 중간에 고릴라 복장을 한 사람이 등장해서 이들 사이를 통과했다. 그냥 지나친 것도 아니고, 중간에 한 번 멈춰 서서 진짜 고릴라처럼 자신의 가슴을 몇 번 두드리기까지 했다. 이 영상에 등장하는 고릴라를 보지 못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 이 영상을 본 사람들 중에서 약 50%가 고릴라를 보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

혹시 고릴라를 보지 못한 사람들은 영상에 집중하지 않고 도중에 딴짓을 한 것은 아닐까? 하지만 고릴라를 보지 못한 참여자들도 몇 번의 패스가 이루어졌는지를 거의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뭐가 문제였을까? 이 연구의 핵심은 패스의 횟수를 세도록 한 것이다. 참여자들은 두 팀 중 한 팀의 패스만 정확히 세기 위해서 모든 주의를 기울여서 공의 움직임을 쫓았던 것이다. 그 결과, 주의를 두지 않았던 대상인 고릴라를 보지 못한 것이다.

부주의 맹시가 발생하는 이유는 우리의 의식이 처리할 수 있는 정보가 매우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눈을 포함해서 우리의 감각기관은 수많은 정보를 접수하는데, 이 중에서 의식적으로 처리하는 것은 우리가 주의를 둔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주의는 선택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선택한 대상(농구공 패스)에 주의를 집중하면, 다른 대상(고릴라)에는 주의를 둘 수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그 결과, 눈은 뜨고 있지만 주의를 두지 않은 대상은 눈앞에 있어도 보지 못하는 일이 발생한다.

운전 시작 전 휴대전화를 끄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시반 요원도 아니고, 평생 눈앞을 지나가는 고릴라를 볼 일도 없다. 하지만 평범한 사람의 일상에도 부주의 맹시는 일어난다. 단지 그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자각하지 못하고 지나칠 뿐이다. 일상생활 중에 부주의 맹시가 일어나는 가장 흔한 상황은 운전 중에 전화통화를 하는 경우다. 통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한 인지적 과제다. 상대방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 기억 속에 저장된 정보를 찾아내야 하고, 자신의 의견을 말하기 위해서 순간순간 판단과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이야기의 주제가 복잡해지면 상대방의 말에 숨은 진심을 찾아내야 하고, 가끔은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야 한다. 통화는 농구공의 패스 횟수를 세는 것보다 더 많은 주의를 요구한다. 따라서 통화에 집중하는 동안 우리의 주의는 운전이 아닌 통화에 집중된다. 그 결과, 부주의 맹시에 빠지게 된다. 눈을 뜨고 앞을 보며 운전을 하고 있지만, 통화에 집중하는 동안에는 눈앞에 나타난 고릴라를 보지 못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핸들을 잡는 순간 우리는 모두 감시자가 된다. 하지만 통화를 하는 순간 부주의 맹시에 빠지게 된다. 운전 중 휴대전화 사용은 사고 발생 위험을 4배 정도 증가시킨다. 통화 탓에 반응속도가 느려지는 것은 초보 운전자나 경험이 많은 운전자나 마찬가지다. 운전을 잘한다는 사람들조차도 휴대전화로 통화를 하는 도중에 발생한 급박한 상황에는 빠르게 대처하지 못한다. 흥미로운 것은, 핸즈프리 기구를 사용하더라도 운전자는 반응 속도를 늦춘다는 것이다. 휴대전화를 손으로 쥐고 있든 아니든 간에 통화를 한다는 것 자체가 운전자의 주의를 갉아먹기 때문이다. 이제는 음주운전과 마찬가지로 ‘통화운전’의 위험성에 대한 사회적인 논의가 필요한 시점이 된 것으로 보인다. ‘운전 시작 전 휴대전화 끄기’ 습관의 중요성에 대한 캠페인이 필요하다.

전우영 충남대 교수·심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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