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로 뛰는걸요”… 아뿔싸 실책!
여성 사회인야구단 ‘나인빅스’ 정슬기씨의 소개팅 실패기
알록달록한 꽃송이가 감색 바탕 스커트 위에서 나풀거렸다. 레이스 달린 하얀 블라우스 위로 나부끼던 긴 생머리는 그 남자 앞에서 잔잔하게 내려앉았다.
“안녕하세요? 박아무개 씨(31) 맞죠?”
그녀, 정슬기 씨(27)의 조그만 목소리는 음계로 따지면 ‘솔’쯤. 출신 지역을 가늠할 수 없는 세련된 말씨였다. 사실 그녀의 고향은 경남 사천의 삼천포다. 진주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교대에 합격한 뒤에야 서울 말씨를 배웠다.
그녀의 자태에 만족한 듯 남자는 흐뭇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소개팅을 주선해준 친구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소위 말하는 1등 신붓감이었다. 어느 결혼정보회사의 등급표에는 초등학교 여교사가 최상급으로 분류된다고 했다. 시간은 화기애애하게 흘렀다. 문득 주선자가 넌지시 알려준 그녀의 취미가 생각났다.
“야구 좋아하신다면서요?”
그녀는 소개팅이 또다시 틀어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녀는 스포츠광인 아버지의 영향으로 일곱 살 때부터 ‘삼천포 갈매기’였다. ‘갈매기’는 프로야구 롯데의 광팬들을 이르는 말이다. 롯데 중계는 빼먹지 않고 보았지만 대학 3학년이 돼서야 처음으로 야구장에 가봤다. 2008시즌 프로야구 올스타전이었다. 관중석에서 선수들이 입장했는데 텔레비전으로만 보던 마해영(전 롯데)이 그녀 옆을 스쳐 지나갔다. 그날 이후 그녀는 야구에 더 깊숙이 빠져들었다.
옳거니. 남자는 쾌재를 불렀다. LG팬인 그는 오랜만에 신바람이 난 터였다. 잠실구장에서 여자친구와 함께 ‘치맥(치킨에 맥주)’을 먹는 게 꿈이었던 그였다. 여느 남자 야구팬 뺨치는 그녀의 해박한 야구 지식. 남자는 그제야 그녀가 보통 야구녀가 아니란 걸 알아차렸다.
“야구를 직접 하신다고요?”
“아…. 네.” 잔뜩 움츠러든 그녀의 목소리는 처음과 달리 음계 ‘레’에서 그쳤다. 그녀는 평범한 뜬공을 글러브에서 놓친 기분이 들었다. 야구로 치면 ‘본헤드플레이’(어처구니없는 실책)였다. 지금껏 직접 야구를 한다고 털어놓은 소개팅에서는 백전백패했다.
교대에 다니던 시절 그녀는 티볼 동아리에 들었다. 티볼은 야구에서 파생된 스포츠로 투수 없이 배팅 티에 공을 얹어놓고 치고 달리는 방법으로 진행돼 남녀노소 즐길 수 있었다. 티볼 동아리와 함께 처음으로 야구장을 방문한 그녀는 진짜 야구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녀는 교사가 된 뒤 2011년 여자 사회인야구단 ‘나인빅스’의 문을 두드렸다.
마해영의 등번호 49번을 단 그녀는 외야수를 맡았다. 만지는 야구는 보는 것보다 더 흥분됐다. 사회인 야구에 발을 들인 지 만 2년이 지난 지금도 그녀는 여전히 후보다. 하지만 열정은 프로선수 못지않다. 그녀의 주말 이틀은 온통 야구로 채워졌다. 주말로도 모자라 화, 수, 목요일 중에 하루는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의 한 실내야구연습장에서 2시간 동안 야구를 배운다. 주전 자리를 꿰차고픈 마음 때문이다.
“와, 야구가 그렇게 좋아요?”
남자의 눈동자가 검게 탄 그녀의 손등을 훑더니 잠시 흔들렸다. 그녀는 일주일에 3일을 야구에 바치는 여자였다. ‘이런 여자와 주말을 오붓하게 보낼 수 있을까.’ 남자는 주말이 아니라면 느긋하게 데이트를 할 수 없는 평범한 직장인이었다. 남자는 이 여자의 마음속에 자리한 ‘야구’를 이길 자신이 없어졌다. 그의 말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며칠 뒤 두 사람의 소개팅을 주선한 사람이 그녀에게 낯익은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미안해. 그 남자가 평범한 여자를 만나고 싶대.”
그녀에게 소개팅 결과를 전해 들은 동료 여교사 박정윤 씨(26)는 “같이 저녁을 먹을 때도 스마트폰으로 야구 중계를 보고 돈 생기면 예쁜 옷보다 방망이를 사려고 하는데 인기가 없는 게 당연하다. 야구를 줄여야 시집갈 수 있다”며 돌직구를 날렸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야구하는 걸 이해하고 응원하는 사람을 만나면 타협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면서 “황재균(롯데) 같은 남자를 만난다면 주말에 하루 정도는 야구를 안 해도 좋을 것 같다”며 웃었다.
※ 정슬기 씨가 소속된 나인빅스와 같은 여자 야구팀은 경기도에만 8개. 2013년 8월 현재 한국여자야구연맹에 등록된 여자 야구팀은
전국 40개로 등록 선수는 900여 명이다. 2007년 연맹이 창립될 당시엔 16개 팀 200명에 불과했다. 올해 전국 대회는 네
차례 치러진다. 3월 CMS기, 5월 익산시장기에 이어 7월 한국야구연맹(KBO)총재배가 끝났고, 31일부터 규모가 가장 큰
LG배 한국여자야구대회가 전북 익산시 야구장에서 열린다. 전국 대회 외에도 올해로 7년째를 맞고 있는 부평국화리그 등 총 6개의
지역별 여자야구 리그가 연중 치러진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