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전범국→모범국 탈바꿈한 독일을 가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24일 03시 00분


독일의 수도 베를린은 거대한 속죄의 도시였다. 과거 침략의 역사를 부정하고 우경화 바람이 불고 있는 일본과는 달랐다. 독일의 과거 청산은 21세기에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2005년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 인근에 설치된 유대인 홀로코스트(대학살) 기념관에는 나치에 희생된 사람들의 묘석을 상징하는 2700개의 크고 작은 콘크리트 조각이 놓여 있다. 나치의 만행을 영원히 잊지 말라는 엄숙한 외침으로 독일인들은 여긴다. 베를린=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독일의 수도 베를린은 거대한 속죄의 도시였다. 과거 침략의 역사를 부정하고 우경화 바람이 불고 있는 일본과는 달랐다. 독일의 과거 청산은 21세기에도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2005년 베를린 브란덴부르크문 인근에 설치된 유대인 홀로코스트(대학살) 기념관에는 나치에 희생된 사람들의 묘석을 상징하는 2700개의 크고 작은 콘크리트 조각이 놓여 있다. 나치의 만행을 영원히 잊지 말라는 엄숙한 외침으로 독일인들은 여긴다. 베를린=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17일 오후 독일 베를린 시내 한 주택가. 회색빛 보도에 도드라지게 박힌 황금색 명판이 해질녘 노을에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고개를 숙여 읽어보니 ‘그가 여기 살았다(Hier wohnte). 엠마, 1915년생, 1938년 아우슈비츠로 끌려갔다’는 내용이다. 나치에 끌려간 23세 꽃다운 여성은 역사책에 나오는 인물이 아니라 바로 길가의 옆집, 저 창문 안쪽에 살던 평범한 여성이었다.

이 명판은 독일의 조각가 귄터 뎀니히 씨(66)가 쾰른에서 처음 만들기 시작했다. 그는 1992년 나치에 의한 집시의 강제 이주 50주년 기념 전시회에서 “이 지역에는 결코 집시들이 살았던 적이 없다”는 한 할머니의 항의를 받았다.

그는 나치 시대의 범죄를 부인하는 할머니의 말에 충격을 받았다. 그 길로 집시와 유대인들이 강제로 끌려갔다는 수많은 자료를 찾아내 그들이 이송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 앞에 ‘슈톨퍼슈타인(Stolpersteine)’이라는 명판을 심기 시작했다. 걸림돌이라는 뜻의 슈톨퍼슈타인은 명판이 훼손되거나 떨어져나가지 않도록 동판에 가로 세로 높이 10cm의 돌을 끼워 만든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평범한 유대인 희생자들은 이런 식으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났다.

“나치 희생자가 800만 명이 넘는다는 통계는 먼 과거의 역사로 희미하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 조그마한 명판은 수십 년 전에 나치에 의해 강제로 떠나야 했던 이웃이 비로소 우리 마을로 다시 돌아오게 됐다는 것을 의미하죠.”(귄터 뎀니히)

슈톨퍼슈타인 심기는 독일과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각 지역의 학교와 마을에선 나치 피해자들이 살았던 사람들의 주거지를 조사하고 기금도 만들었다. 슈톨퍼슈타인은 현재 베를린 시내에만 5000개가 넘고, 오스트리아 헝가리 노르웨이 이탈리아 등 유럽 전역을 합치면 4만 개가 넘는다.

기자가 지난 주말 베를린을 찾았을 때 과거 청산의 의지가 독일인의 생활 속에 깊숙이 배어 있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올해는 1933년 히틀러가 총리직에 임명돼 나치가 정권을 장악한 지 80주년이 되는 해. 발길이 닿는 곳마다, 눈길이 머무르는 곳마다 ‘잊지 말아야 할 과거’를 상기시키고 있는 베를린은 거대한 ‘속죄의 도시’처럼 보였다.

그런데 같은 2차대전 전범국인 일본은 지금 전쟁의 피해를 본 아시아 국가 국민에 대해 사과도 없이 올해 광복절을 넘겼다. 독일은 왜 21세기에도 끝없이 무릎 꿇고, 사죄를 하는 것일까.
▼ “영원한 책임 잊지 말자” 베를린에만 추모시설 40여곳 ▼

‘가해자’ 인식이 자리 잡기까지

베를린 시내 곳곳에는 독일이 인류 역사상 미증유의 범죄를 저지른 가해자였음을 알리는 기념물이 있다. 나치가 끌고 간 희생자들이 살고 있던 집 주변에는 희생자들의 이름을 새겨 넣은 돌인 ‘슈톨퍼슈타인’이 놓여 있다(왼쪽 사진). 나치의 비밀경찰 게슈타포와 히틀러 친위대 슈츠슈타펠(SS)친위대 총사령부가 있던 곳은 전시관으로 바뀌어 관람객들이 게슈타포의 활동 자료 등을 보고 있다(오른쪽 위 사진). 나치에 학살된 50만 명의 집시 희생자를 기리는 티어가르텐 숲에 있는 ‘집시 추모관’에도 많은 시민이 찾아오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10월 개관 직후의 모습. 베를린=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헬무트 콜 총리가 집권하던 1986년 6월, 서독의 대표적인 보수지인 ‘프랑크프루터 알게마이네 차이퉁(FAZ)’에 역사학자 에른스트 놀테가 ‘가버리려 하지 않는 과거’라는 글을 실었다. 베를린 자유대 현대사 교수였던 놀테는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을 소련의 위협에 대한 일종의 정당방위로 해석했다. 즉, 히틀러의 이데올로기에는 사회주의 혁명의 확산에 대한 두려움이 그 핵심에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전후 나치즘에 대한 논의들은 독일인들을 도덕적 죄책감에서 놓여나지 못하게 만드는 좌파의 ‘집단적 사고’라는 횡포이며, 이러한 행태는 이제 끝내야 한다”고 주장했다. 요즘 일본 극우파의 ‘자학사관(自虐史觀)’을 버려야 한다는 주장과 비슷하다.

놀테의 도발에 대해 자유주의 좌파를 대표하는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가 격렬히 맞서면서 ‘역사학자 논쟁’이 불붙었다. 서독사회에서 약 2년에 걸쳐 진행된 논쟁을 통해 1000개가 넘는 글이 신문과 잡지 등 각종 매체를 통해 발표됐다. 논쟁의 반향은 지식인 사회를 넘어 일반 독자에까지 미쳤다.

그 결과 스탈린의 계급학살이 히틀러의 홀로코스트를 끌어냈다는 놀테의 논리는 설 땅을 잃었고 결국 그는 학문적으로 고립됐다. ‘역사학자 논쟁’이 끝나면서 나치 범죄에 대한 인정과 ‘가해자 의식’이 독일 민주주의의 요체라는 인식이 퍼지게 됐다. 이런 논쟁을 거치면서 ‘가해자’로서의 기억을 잊지 않게 하는 기념물도 대규모로 세워졌다.

15일 오후 동서 베를린을 가르던 장벽이 서 있던 포츠담 광장과 찰리 검문소(Chekpoint Charlie)를 잇는 빌헬름 거리. 군데군데 뻥 뚫린 콘크리트 담 사이로 녹슨 철근이 삐져나온 장벽의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었다. 담장 옆 지하에 벽돌이 무너져 내린 터에 음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전시장이 눈길을 끈다.

2010년 5월에 문을 연 ‘테러의 지정학(Topogra-phie des Terrors)’ 전시장이다. 이곳은 1933∼1945년 나치 독일의 비밀경찰인 게슈타포, 히틀러 친위대 슈츠슈타펠(SS), 제국중앙보안국 본부가 있던 거대 시설이었다. 말 그대로 나치의 테러와 전쟁 범죄를 기획하고 총괄 지휘한 사령부였다.

이곳의 전시를 총책임지고 있는 토마스 루츠 씨(57)는 “감성적으로 추모하는 것만으로는 나치 범죄의 실체에 다가가기엔 부족하다”며 “누가 테러 명령을 내렸고, 어떻게 실행됐는지 ‘가해자’의 실체를 알리고 교육해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평범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전쟁범죄자가 됐는지를 객관적으로 밝혀내야 이런 일의 재발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전시공간 안에는 나치의 심벌 같은 것만 없앤 채 나치의 만행을 사실 그대로 전시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엿보였다. 이 전시관을 개관한 뒤에 신나치주의자들이 화염병을 던지거나 폭탄 테러를 하겠다는 협박을 하기도 했다.

이 공간은 종전 후에도 수십 년간 땅속에 묻혀 있었다. 장벽 주변의 허허벌판으로 남은 땅은 기껏해야 아이들의 범퍼카 놀이시설로나 이용됐을 뿐이었다. 그러던 것이 1987년 베를린 시 탄생 750주년을 맞아 ‘가해자로서의 역사’도 베를린 역사의 일부라는 취지에서 첫 전시회를 열었다.

독일도 처음부터 과거사 극복에 적극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종전 직후 미국에 의해 강력하게 추진됐던 ‘탈(脫)나치화’는 다수 독일인의 반발을 초래했고, 게다가 동서냉전이 시작되면서 용두사미식으로 중단되곤 했다. ‘라인 강의 기적’으로 불리는 경제부흥에 매달리던 1950년대 독일 사회는 과거사에 대해서는 ‘침묵의 공동체’였다.

이런 침묵을 깨뜨린 계기는 무엇일까. 루츠 씨는 “유대인 연합회를 필두로 하는 국제사회의 강력하고 끈질긴 압박과 독일 지식인 사회의 노력”이라고 대답했다. 특히 전후에 태어난 ‘1968혁명’ 세대가 부모들에게 ‘나치 시대’에 무얼 했느냐고 묻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독일인들은 나치 테러의 가해자이자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는 것.

독일인들은 또 유대인에 대한 참혹한 범죄를 낱낱이 드러낸 아우슈비츠 재판(1963∼1965년), 나치 범죄에 대한 공소시효 논쟁(1965년) 등을 겪으면서 어두운 과거에 대한 태도를 조금씩 바꿨다. 이런 과정을 거친 뒤인 1970년대 빌리 브란트 총리가 집권하면서 과거사 청산 자세가 사회 곳곳에 뿌리내리게 됐다.

“독일이 언제나 스스로 과거사 반성을 한 것은 아닙니다. 수출 주도 국가 독일이 상대국에 반감을 사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보상금을 지불하고, 사죄를 한 경우도 많습니다. 예를 들면 냉전시대에는 옛 소련이나 동구권 국가들에 대한 보상은 이뤄지지 않았지요. 당시엔 독일의 이익에 부합되지 않았습니다. 만일 독일이 적극적으로 사죄하지 않았다면, 독일이 유럽 통합의 주역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독일서 日 아소처럼 망언하면 정치생명 바로 끝날 것”▼

베를린 시내 한복판의 희생자 추모시설


독일 베를린 유대인 박물관에는 입구부터 바닥, 유리창까지 수평이나 수직으로 된 것이 하나도 없고 모두 기울어져 있다. 관람객들이 수용소에 갇힌 나치 희생자의 불안한 심정을 느끼도록 한 것이다(왼쪽 사진). 오른쪽은 나치의 헌법 개정에 반대하다 살해당한 96명의 의원을 기리는 추모비. 일본 아소 다로 부총리의 “나치에게 배우자”는 망언을 꾸짖는 역사의 현장이다. 베를린=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17일 오후 베를린 한복판 브란덴부르크문과 독일연방의회 의사당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광장에는 물결치는 파도처럼 2700개의 콘크리트 조각이 놓여 있었다. 이곳은 2005년 종전 60주년을 맞아 미국 건축가 피터 아이젠먼이 설계한 유대인 홀로코스트 기념관이다.

‘콘크리트 무덤’을 찾은 수많은 관광객은 숙연한 표정으로 묘비 사이를 걸으며 명상에 잠겼다. 걷다보면 돌덩이가 어느새 사람 키보다도 커져 유대인 게토(집단거주 지역)나 강제수용소에 갇힌 듯한 음울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나치 희생자는 유대인뿐만이 아니었다. 게르만 민족의 피를 더럽히는 불순한 자들로 규정된 동성애자들은 가슴에 핑크색 역삼각형(Rosa Winkel)을 붙이고 강제수용소에 감금됐고, 집시들도 50만 명이나 희생됐다. 브란덴부르크문 주변에 있는 티어가르텐 숲 속에는 2008년 동성애자 학살 희생자 추모시설이 들어섰고, 2012년에는 집시 희생자 기념관이 세워졌다. 2014년에는 베를린 필하모니아 홀 부근에 나치에 의해 살해당한 장애인을 추모하는 기념물이 세워질 예정이다.

이렇게 베를린 시내 한복판에 끊임없이 세워지는 추모시설은 독일연방의회 의장이 회장으로 있는 ‘나치학살 희생자추모기념사업회’가 관리한다. 16일 오전 추모사업회의 우베 노이베르커 이사장을 만났다. 그에게 통일 후 베를린에 추모 시설을 대규모로 세운 배경을 물었다.

“1990년대 초반 동구권이 무너지면서 옛 소련이 해체되고, 유고연방이 해체되는 등 모두가 쪼개지고 갈라졌다. 그런데 독일만 통일되면서 인구와 면적이 크게 늘어났다. 강력해진 독일이 과거 나치 시대로 회귀하는 것이 아니냐는 세계인들의 우려가 나왔다. 통일 후 국회에서 가장 먼저 결정된 것이 나치 희생자 추모시설 건립이었다. 폴란드 아우슈비츠 등 외국에는 추모 시설이 많은데 정작 독일에는 없다는 반성도 일었다.”

동서 베를린을 가르던 장벽이 철거되면서 장벽 주변의 거대한 땅이 베를린시 소유가 되었다. 브란덴부르크문과 독일연방의회 의사당이 있는 중심가를 상업지구로 개발하려는 시도도 있었다. 그랬다면 베를린시가 천문학적인 개발 이익을 얻었을 것이다. 하지만 독일은 그 자리에 추모시설을 짓기로 결정했다.

베를린 시내 클리스트 공원에 서 있는 나치 강제수용소의 이름들이 적힌 입간판. 맨 위에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고 적혀 있다. 베를린=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베를린 시내 클리스트 공원에 서 있는 나치 강제수용소의 이름들이 적힌 입간판. 맨 위에 “우리는 결코 잊지 말아야 한다”고 적혀 있다. 베를린=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중심가에 세워진 기념비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독일연방의회 의사당 앞 공화국 광장에 설치돼 있는, 나치에게 살해당한 의원들의 추모비였다. 기념비에는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민주헌법을 수호하기 위해 히틀러에게 저항하다가 목숨을 잃었던 의원 96명의 이름과 소속 정당, 사망 연도 등이 적혀 있다. 이 기념비는 일본의 아소 다로(麻生太郞) 부총리가 “비밀리에 헌법을 바꿨던 나치로부터 배우자”고 했던 그 나치의 수법이 얼마나 잔인하고 폭력적인 과정을 숨기고 있었는지를 웅변하고 있었다.

노이베르커 이사장은 “만약 독일 내에서 정치인이 아소 부총리와 같이 군국주의를 미화하는 망언을 했다면 그날로 그의 정치 생명은 끝났을 것”이라며 “정상적인 국가에선 상상할 수 없는 사고”라고 비판했다.

베를린 시내에는 이 밖에도 폴란드 희생자 기념관, 레지스탕스 박물관, 안락사 희생자 추모관, 죽음의 열차 기념물 등 나치 과거사 관련 시설이 40여 개에 이른다.

독일에서는 일본의 야스쿠니신사처럼 전범을 추모하는 시설은 찾아볼 수 없다. 독일 정부는 지난해 1급 나치 전범 루돌프 헤스의 묘가 극우청년들의 성지 순례지가 됐다는 이유로 묘지 전체를 철거해버렸다. 오스트리아 북부 레온딩에 있는 한 교회묘지에서도 신나치주의자들이 히틀러의 부모 알로이스와 클라라의 묘소를 자주 찾아오자 그 묘소를 없애버렸다.

베를린 국회의사당에서 불과 수백 m 떨어진, 히틀러가 자살한 최후의 벙커도 ‘자랑스러운 유적지’가 아니었다. 이 지하벙커는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후 비교적 온전한 상태로 발견됐으나, 인근 지역이 주택가로 재개발된 이후 수십 년 동안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다. 독일 정부는 신나치주의자들의 성지로 추앙될까 우려해 아무런 표지도 세워놓지 않았다. 2006년 독일 월드컵을 앞두고 자그마한 표지판이 설치된 이곳에는 18일에도 전문 가이드들이 이끌고 온 소수의 관광객만 눈에 띄었다.

일본에서는 상상하지 못할 풍경들을 독일에서는 모두 일상에서 볼 수 있었다. 만일 일본이 이렇게 진심 어린 반성과 사죄를 한다면 유럽연합을 이끄는 독일처럼 아시아에서 중심 국가 역할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매우 비현실적인 상상’이 꼬리를 무는 현장이었다.

베를린=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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