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중년男]멋 내는 남자는 기생 오라비? 이젠 외양도 능력인 시대!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8월 28일 03시 00분


중년 남자들과의 패션대담

서울 성북구 성북동 빌라 델 꼬레아에서 조경아 칼럼니스트가 박성준 씨(왼쪽), 전정욱 씨와 중년 남자의 패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이상욱 이은비, 장소협조: 빌라 델 꼬레아
서울 성북구 성북동 빌라 델 꼬레아에서 조경아 칼럼니스트가 박성준 씨(왼쪽), 전정욱 씨와 중년 남자의 패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이상욱 이은비, 장소협조: 빌라 델 꼬레아
《칼럼니스트 조경아 씨가 옷 잘 입기로 소문난 두 중년 남자를 최근 만났다. 세계적 장인들을 초청해 고급 원단으로 맞춤 슈트를 만드는 ‘빌라 델 꼬레아’의 박성준 이사와 연 매출 800억 원의 무역상사인 한석인터내쇼날의 대표이자 유명 패션 블로거인 전정욱 씨다.》

조경아: 대한민국 남자가 달라지고 있다는 얘기가 들린다.

박성준: 10년 전과 비교하면 현격한 차이가 있다. 한국의 남자들이 검정 구두 속 흰 양말을 벗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 ‘검정 구두에 흰 양말’이 촌스러운 패션 감각의 대표적 예이기는 하나 어떤 한 세대를 지나치게 면구스럽게 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민망함도 있다. 어느 기업의 50대 후반 임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재미있는 얘기를 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던 이유는 교복을 입을 때부터 신입사원이 될 때까지 어머니가 건네 주신 것도, 아내가 눈부시게 빨아 신겨준 것도 흰 양말이었다고.

: 거기에서 변화의 촉발이 있다. 예전의 중년들은 어머니가 사다 준 옷을 입고 자라 아내가 사 입히는 옷을 입고 늙어서는 딸이 사 준 옷을 입고 돌아가셨다. 지금의 중년이라 불리는, 여전히 혈기왕성한 세대는 자신의 취향과 안목을 직접 향유하는 데 적극적이다.

: 그 취향과 안목, 그것을 향유하는 방식이 어느 날 갑자기 생기지는 않았을 텐데….

전정욱: 외국 ‘경영학석사(MBA) 세대’의 출현에서 답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슈트는 서양의 복식이다. 우리보다 한참을 앞서 일상의 복식으로 입어 온 나라에서 유학을 하고, 성취가 곧 패션으로도 드러나는 비즈니스맨의 세계를 체험하고 돌아온 MBA 세대들이 우리 사회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면서 남자들의 패션 안목이 성장했다고 본다.

: 매체가 다양해진 것도 한 요인이다. 남성 잡지, 남성 패션을 따로 이야기하는 방송 프로그램, 블로그,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멋진 남자들이 넘친다. 유학파 남자를 포함한 여유 있는 세대의 등장이 이 변화를 주도했다고 생각한다. 정서적, 경제적 여유를 획득한 세대들의 움직임이 주효했다.

: 그런데 전통적으로 한국의 남자들은 멋을 내는 것에 터부 아닌 터부가 있었다. 두루마기 대신 코트를 입는 시절이 오면서 멋을 내는 남자들은 ‘기생 오라비’라는 표현을 들어야 했고 남자가 자신을 꾸미는 것은 남자답지 못하다고 생각했다. 선비는 외양을 꾸미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해야 한다고 배운 유교적 영향도 있었다. 설령 경제적으로 풍요해도 남자 스스로 치장하는 데 비용을 쓰는 것을 불편해했다. 그런데 요즘 주말에 백화점에 가보면 청년층은 물론이고 중장년층들도 동반자 없이 쇼핑하기에 여념이 없다.

: 교육이 달라졌다. 그리고 남자들도 아름다움을 욕망하고 소비하는 즐거움을 알게 됐다. 아들을 키울 때에도 예전과 다르게 자신만의 개성 연출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어려서부터 가르치고 있다. 외양과 상관없이 능력만 있으면, 성공만 하면 된다는 식의 사고가 이제 대한민국에는 없는 듯하다. 멋진 외양 역시 능력의 일부라고 받아들여진 것이다.

: 중년 남자의 스타일 변화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입는 즐거움을 알게 되었고 그 모습을 좋아하는 아내, 가족, 동료의 시선을 즐길 수 있게 되었으며 옷에 대해, 옷에 깃든 수많은 콘텐츠들을 얘기하는 것에 재미를 느낀다는 말들을 한다. 그러니 보다 자신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고, 그 관심이 보다 좋은 몸, 좋은 음식, 좋은 문화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 같다.

: 주말의 패션이 달라졌다는 것을 얘기하고 싶다. 일을 하는 주중의 패션은 멋을 내기가 어렵지 않다. 많지 않은 규칙이 있고 그것을 따르기만 하면 된다. 자신의 몸에 잘 맞는 슈트에 검은색 구두, 염색이 잘된 넥타이와 정갈한 셔츠면 충분하니까. 그러나 주말의 옷차림은 다르다. 자신의 스타일을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낼 수밖에 없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골프 패션이 일상에 범람했다. 그 다음은 등산복이었다. 등산복을 입고 백화점에도, 식당에도, 친구네 집에도 갔다. 그런데 요즘은 남자 어른들이 입어야 하는 ‘잘 갖춘 주말 룩’이 자주 눈에 띈다. 재킷과 치노 팬츠, 로퍼를 신은 중년 남자가 늘어났다.

: 예전에는 긴장된 어깨, 총기 넘치는 눈빛이 신입사원을 식별하는 기준이었다면 요즘은 갈색 구두에 짧은 바지를 입으면 그가 곧 신입사원이라는 소리를 듣는다. 몇 년 전부터 비즈니스 슈트에 클래식 강풍이 불면서 갈색 구두가 ‘대세’가 되었다. 국내 제화브랜드들이 앞다퉈 갈색 구두를 내놓고 있다. 검정 구두는 이제 흰 양말과 함께 박물관에 갈 판이다.

: 과도하게 왜곡된 것 같다. 비즈니스맨의 기본은 검정 구두이다. 요즘 검정 구두를 신으면 촌스럽고 고루하게 느끼는 것 같은데 오히려 갈색 구두는 멋을 낼 때 신는 특별한 선택일 뿐, 넥타이를 매고 고객을 응대하거나 비즈니스 미팅을 하는 사람에게 맞는 신발은 오히려 검은색 신발이다.

: 바지의 길이도 마찬가지다. 슈트에는 암묵적인 룰이 있다. 재킷이 길어지면 바지도 길어지고 재킷이 짧으면 바지도 짧아진다. 남성의 옷 입기의 교과서와 같은 ‘Dressing the man’이라는 책을 봐도 1 대 1이 가장 조화로운 비율이라고 나와 있다. 슈트에 유행은 분명히 있지만 슈트는 유행 이전의 어떤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 슈트를 유니폼이 아니라 멋을 내는 하나의 형태로 조금 더 발전시켜 입은 중년의 남자를 보면 엄격함과 동시에 유려한 여유 같은 것이 느껴진다. 최근에 그런 중년들이 더 많아져 ‘옷을 잘 입는다’의 스펙트럼도 굉장히 넓어졌다. 슈트를 잘 입는다는 것, 나아가 옷을 잘 입는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 튀지 않는데 튀는 사람이 옷을 잘 입는 사람이다. 옷으로 자신을 주장하는 것이나 옷이 스스로 주장하는 스타일은 보기에 불편하다. 40, 50대의 옷 잘 입는 남자는 함께 있는 사람을 돋보이게 하는 옷차림을 한다. 그것이 남자 어른의 옷 입기라고 생각한다. 가장 흉해 보이는 것은 아내는 정말 훌륭하게 차려입었는데 남편은 그렇지 않거나 그보다 더 보기 싫은 것은 남자는 있는 대로 멋을 냈는데 아내는 전혀 멋과는 상관없는 차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멋보다는 조화가 중요한 시기다. 나는 외출할 때 먼저 아내가 무엇을 입었는지 본다. 그리고 컬러를 맞춘다. 아내보다는 덜 돋보이지만 우리 둘을 봤을 때에는 조화로운 커플이구나라는 생각을 할 정도로 입는다. 절친한 패션 브랜드 아트디렉터의 동시통역을 한 적이 있다. 그가 더블 슈트에 타이드업을 하겠다고 해서 나는 싱글 수트를 입어 상대적으로 수수해 보이도록 했다. 그것이 남자의 멋내기다.

: 동감한다. 옷이 아니라 사람이 먼저 보이도록 옷을 입는 남자가 옷을 잘 입는 남자다. 스타일이 먼저 보이거나 비싼 옷을 많이 입는 남자, 그런 자신을 자랑하는 남자는 옷 잘 입는, 멋있는 중년의 남자는 아니다. 빌라 델 꼬레아의 고객들을 보면 옷이 기능을 넘어선 심미적 만족, 그리고 자신의 취향을 담는 그릇, 그리고 그것으로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그 과정 자체를 즐기는 분들이다. 그분들은 대체로 연륜이 있고 보다 정중한 서비스와 보다 각별하게 엄선된 선택들을 원한다.

: 남자에게 옷은 전통적으로 계급의 식별 수단이었다. 한 회사를 예로 들 때 대표와 대리가 같은 브랜드의 같은 스타일을 입은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브랜드로 대별해 얘기하자면 대표가 ‘키톤’이나 ‘브리오니’의 스타일을 즐겨 입는다면 중간관리자는 ‘에르메네질도 제냐’나 ‘벨베스트’, 그 아래는 국내 기성복을 입을 것이다. 이것은 월급의 차이가 아니라 선택할 수 있는 경제, 정서, 연륜의 차이인 것이다.

: 남성 잡지 ‘GQ’의 이충걸 편집장은 “지금의 20대가 중장년이 되면 대한민국은 댄디한 남자들이 가득찬 나라 중에 하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나.

: 한국의 여자는 매우 패셔너블하다. 다양한 스타일을 즐기고 그것에 자신의 개성을 반영한다. 남자들에 비해 적어도 10년은 앞서 있는 것 같다. 남자들 역시 점진적으로 그 사이를 좁힐 것 같다. 한국 남자들은 미감이 뛰어나고 섬세하고 심지가 굳다. 지금의 중년층이 장년층이 되고 청년이 중년이 되는 그 시기, 한국의 패션 역사의 매우 멋진 한 장면이 될 것이라 믿고 있다.

: 그 세대는 패션을 그저 호흡하듯 누려왔다. 더 다양한 스타일이 나올 것이고 더 진화한 룩이 나올 것이다. 다양한 스타일을 즐긴 그들이 보여주는 중장년층의 슈트는 어떤 사회의 풍경을 만들어낼지 기분 좋은 기대가 된다.

글: 조경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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