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지 마시라. 버트런드 러셀(1872∼1970년)이 1950년에 발표한 이 책은 이번이 첫 번역이란다. 철학자로서보다는 문필가로서 더 사랑받는 그의 수필집 중에 아직도 번역되지 않은 것이 있다니. 혹시 책 제목 때문은 아닐까? 하지만 책 한 쪽 분량의 서문을 읽고 웃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앞서 발표한 책 ‘인간의 지식’ 서문에서 내가 전문 철학자들만을 위해 글을 쓰지 않으며 ‘철학은 본디 지식층 일반의 관심사를 다룬다’라고 적었다. 서평가들은 이 말을 빌미로 나를 꾸짖었다. 그들이 보기에 내 책에는 어려운 내용이 일부 들어 있는데 저런 말로 독자들을 속여 책을 사게 했다는 것이다. 이런 비난을 또다시 마주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므로 고백하건대 이 책에는 보기 드물게 멍청한 열 살배기 아이라면 좀 어렵게 느낄 만한 문장이 몇 군데 들어 있다. 이러한 까닭에 다음의 에세이들이 인기를 끌 만한 글이라고 하기는 힘들 듯싶다. 그렇다면 ‘인기 없는’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릴밖에.”
이 에세이집은 러셀의 인생 절정기에 발표됐다. 최고 명문가 출신의 천재 철학자로 각광받던 러셀은 평화주의에 입각해 영국의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반대하다가 반역자로 몰려 미국으로 자발적 망명을 떠난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때는 나치 독일에 대한 혐오로 영국의 참전을 지지했고 1944년 72세의 나이로 케임브리지로 금의환향한 러셀은 그의 책 중 가장 많은 인세를 벌어다 준 ‘서양철학사’(1945년)를 발표하면서 전후 가장 저명한 영미권 지식인이 된다. 이 책이 발표된 1950년에는 노벨 문학상까지 수상했다.
그래서일까, 이 책의 러셀은 자유민주주의와 경험주의라는 영미적 가치의 열렬한 옹호자이다. 영국에서 나온 2009년판 서문에서 커크 윌리스 조지아대 교수는 러셀이 ‘존 스튜어트 밀의 대자(代子)’이자 ‘20세기의 볼테르’를 꿈꿨다고 소개한다. 11편의 에세이 중 ‘이 모든 게 정치와 무슨 상관인가?’에선 정치를 강조한 밀의 향취가 느껴진다면,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에서는 맹신과 무지를 경멸한 볼테르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하지만 러셀에겐 그 둘에게 없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재기발랄한 영국식 위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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