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의 옷수선집
마리아 세실리아 바르베타 지음·강명순 옮김/418쪽·1만5500원·문학동네
이 책을 소설책이라 부를 수 있을까? 책을 읽다가 만나는 사진과 그림, 만화와 지도, 심지어 가로세로 퍼즐까지 바라보고 있자니 디자인 화보나 잡지를 보는 느낌마저 든다. 주인공 마리아나가 미용실에서 헬멧 모양의 스팀기를 쓰고 머리를 손질하는 대목을 보자. 맞은편에는 남자와 고릴라가 헬멧 모양의 ‘뇌 기능 교환기’를 쓰고 있는 DC코믹스 만화의 한 장면이 나온다. 본문과 이미지의 불협화음 같은 조합에 처음엔 이질감이 들지만 익숙해지면 ‘이번에는 어떤 이미지가 기다릴까’ 하는 기대감마저 생긴다.
주인공이 친구들과 원더우먼에 대한 농담을 하는 장면에선 어김없이 원더우먼에 관한 만화컷(사진)이 나오고, 바퀴벌레 퇴치기에 대한 얘기를 나누는 대목에선 본문 중간에 슬그머니 바퀴벌레 퇴치기 광고 전단이 들어온다. 이런 이미지가 담긴 쪽마다 작은 가위그림이 있는 점선까지 그려져 있어 당장이라도 이 점선을 따라 가위질을 하고 싶은 충동이 든다.
본문 편집은 훨씬 파격적이다. 라디오를 들으며 재봉틀을 돌리고 있는 주인공이 엄마와 대화하는 대목에 이르면 본문 텍스트가 아예 세로로 3단으로 나뉜다. 왼쪽은 엄마의 말이, 가운데는 주인공의 말과 ‘들들…’대는 재봉틀 소리가, 오른쪽엔 라디오 방송 내용이 배치된다. 동시에 발생하는 상황을 ‘한편 엄마는…’이나 ‘이때 라디오에선…’ 정도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소설의 한계를 뛰어넘고 말겠다는 애교 같다. 이쯤 되면 감각을 총동원해야 읽을 수 있는 책이라 할 만하다. 2008년 독일에서 ‘올해의 가장 아름다운 책’에 선정되기도 했다.
이 소설은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한 옷 수선집을 배경으로 실연의 아픔을 간직한 마리아나와 그녀에게 드레스를 맡기는 아날리아가 진실한 사랑을 찾는 과정을 그렸다. 독일어로 발표됐지만 남미 출신 작가 특유의 ‘환상문학’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데, 사실 내용보다 외양이 더 ‘판타스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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