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31일 서울 대학로 아트원씨어터 1관에서 막을 올린 연극 ‘클로저’ 초반부 장면. 병원 대기실에서 여주인공 앨리스(한초아)가 의사 래리(배성우)에게 얻은 담배에 불을 붙여 두어 모금 피우더니 곁에 앉은 댄(최수형)에게 권한다.
110분 동안 이 무대 위에는 배우 4명과 담배 6개비가 등장한다. 질퍽하게 얽히는 네 남녀의 애정관계를 냉담하게 응시하는 이야기. 앨리스, 댄, 래리, 안나(김혜나)는 시시때때로 번갈아가며 담배를 피워 물고 연기를 내뿜는다.
1997년 영국에서 초연된 이 작품은 2004년 할리우드에서 내털리 포트먼, 주드 로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져 이듬해 국내 개봉했다. 영화에서도 흡연 장면은 틈틈이 나온다. 영화 속 앨리스는 병원을 빠져나오자마자 행인에게 담배를 빌려 피우다가 댄에게 내민다. 래리와 음란 채팅을 하는 장면에서 연신 담배를 피워대는 댄의 모습도 영화와 연극이 다르지 않다. 담배는 앨리스의 자유분방한 성격, 절제력을 잃어버린 댄의 내면 변화를 드러내는 소품이다. 후반부 스트립 클럽에서 앨리스의 벗은 몸을 탐하는 래리의 흡연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담배 피우는 모습을 짤막하게 구경하고 넘어가는 영화와 달리 연극 무대에서 배우들이 뱉어낸 연기는 다음 장면이 시작된 뒤에도 객석 위로 스멀스멀 번져 오른다. 29일까지 공연하는 뮤지컬 ‘잭 더 리퍼’에서도 주요 배역 중 한 명인 형사 앤더슨이 프롤로그 장면부터 여러 차례 담배에 불을 붙여 길게 연기를 내뿜는다. 지난달 막을 내린 뮤지컬 ‘시카고’에는 남자 배우들이 담배를 피워 문 채 춤을 추는 장면이 있다.
공연 관계자들은 “원작에 없는 흡연 장면을 새로 만들어 넣은 것도 아니고, 등장인물 성격이나 장면 분위기를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 담배를 소품으로 사용했을 뿐”이라고 설명한다. 관련 규제도 없다. 영상물등급위원회 사전심의를 받는 영화와 달리 뮤지컬과 연극은 기획사 내부 논의에 의해 관람등급을 정한다. ‘잭 더 리퍼’는 8세 이상 관람가. 객석이 담배 연기에 무방비로 노출되지만 그에 대해 딱히 따져 물을 근거가 없다.
그러나 국민건강증진법은 제9조에서 “객석 300석 이상의 공연장은 시설 전체를 금연구역으로 한다”고 정했다. 엄밀히 따지면 393석의 아트원씨어터 무대 위 흡연은 이를 위반한 셈이다. 1242석의 서울 디큐브아트센터에서 공연 중인 ‘잭 더 리퍼’, 1549석 규모의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을 쓴 ‘시카고’도 금연법 위반이다.
공연장 측은 예술적 표현을 위한 요소로 들어가는 흡연 장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예술의전당 홍보부 김미희 과장은 “2007년 12월 12일 국립오페라단 ‘라보엠’ 공연 중 성냥으로 불을 붙이는 장면에서 실수로 오페라극장이 화재 피해를 당했지만 연출 의도에 따른 불 사용을 막을 방도는 여전히 없다”며 “소방 시설을 확충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넓은 공연장에서 잠깐 피우는 것인데 크게 문제될 것 없지 않으냐’는 의견에 대한 의학계 반응은 부정적이다. 조홍준 서울아산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공공장소 실내 흡연은 흡연량에 관계없이 천식과 심혈관질환을 유발하는 것으로 최근 연구 결과 밝혀졌다”며 “무대 위 배우의 짤막한 흡연이 관객의 건강에 치명적 피해를 줄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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