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담한 선과 강렬한 색채, 격렬한 붓질로 내면의 열정을 분출한 서양화가, 미국 페미니즘 화가 조지아 오키프를 좋아했으며 한국적 미감에 근거한 색채추상을 실험한 여성작가, 두 권의 시집을 펴낼 정도로 문학적 감수성이 뛰어난 시인화가…. 45년의 생애를 뜨겁게 소진한 한국 색채추상의 대표작가 최욱경(1940∼1985)의 예술을 톺아보는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가 기획한 최욱경전은 유족들이 소장한 미공개 회화와 드로잉을 중심으로 자화상, 콜라주, 흑백 풍경 등 150여 점을 선보인 밀도 높은 전시다. 》
그의 이름은 2007년 국세청의 그림로비 사건에 등장한 ‘학동마을’로 세간의 화제에 올랐다. 미술계에선 표현의 영역을 깊고 넓게 확장하려 했던 그의 여정을 기억하며 ‘작가들이 좋아하는 작가’로 꼽는다.
이장은 큐레이터는 “개막 전부터 관람 문의가 이어지는 것을 보면서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며 “그의 작품을 오키프와 관련지어 유기적 추상으로 해석하는 관점에서 벗어나 한국의 풍경, 오방색과 관련된 측면에서 새롭게 해석할 여지를 보여주는 전시”라고 말했다. 25일까지. 3000원. 02-720-1020
○ 섬세하고 대담하게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 탄탄한 학력과 경력을 쌓은 최욱경은 ‘요절한 천재’로 불린다. 서울대 미대 졸업 후 미국서 공부하고 대학 강단에 섰던 그는 귀국 후 한국적 색채추상의 독자적 세계를 추구했으나 단색화가 지배한 1970년대 한국 화단에서 설 자리를 찾기 힘들었다. 다시 미국을 다녀온 뒤엔 사회와의 접촉을 최소한으로 유지하면서 작업에 매달렸으나 잠자다 심장마비로 먼 길을 떠났다.
전시장에선 자화상들이 먼저 관객을 맞이한다. 깊은 사색에 빠진 듯한 그의 얼굴은 모든 고독하고 외로운 예술가의 초상처럼 다가온다. 시대상을 담은 콜라주, 구상과 추상을 넘나든 드로잉, 흑백 풍경은 팝아트 추상표현주의 구조주의 등 여러 사조와 재료를 섭렵하고 실험한 과정도 볼 수 있다.
2층에 걸린 색채추상 작업은 분출하는 생명력과 에너지를 뿜어낸다. 활화산처럼 폭발한 원색의 대비와 거친 붓질은 시간이 흐르면서 밝고 부드러운 파스텔톤의 추상으로 달라진다. 동과 서, 빛과 어둠 등 대립적 세계를 융합한 캔버스에서 열정과 외로움, 섬세함과 대담함이 어우러지며 긴 여운을 남긴다.
○ 고독하고 치열하게
이번 전시의 백미는 예술에 대한 진지한 모색과 성찰을 담은 드로잉이다. 놀라운 작업량과 자연스러운 인체비례를 선보인 연속 드로잉은 그가 천재이기 전에 끈질긴 노력형 작가임을 보여준다. 평론가 윤범모 씨는 “다양한 자태의 누드, 속도감 있는 필선과 짜임새 있는 구도의 최욱경 드로잉은 그 자체로 완결성 높은 작품들”이라며 “서예가가 부단하게 글씨를 쓰듯 몸에 밴 자기 수련의 과정으로 이루어낸 결과”라고 설명했다. 목탄, 먹과 잉크 등 다채로운 드로잉은 그를 다각도에서 조명할 필요가 있음을 일깨운다.
‘일어나라! 좀 더 너를 불태워라!’ 며칠씩 식음을 전폐하고 오직 그림에 전념했던 화가의 여의도 아파트 겸 작업실엔 이런 문구가 걸려 있었다고 한다. 끝없이 자신을 담금질하면서 작업에 혼신의 열정을 쏟아 부은 최욱경. 전시장을 나오면서 그의 삶이 조금만 더 길었다면 얼마나 새롭고 눈부신 꽃을 피웠을지 문득 궁금해진다.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