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지의 대모’ 박병선 박사(1923∼2011)는 환수문화재를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인물이다. 프랑스 유학 후 파리국립도서관에 근무하면서 ‘직지심체요절’을 찾아냈고, 외규장각 의궤가 고국 땅을 밟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다. 해외에 산재한 우리 문화재 15만여 점 가운데 약 1만 점이라도 되찾은 데는 박 박사 같은 이들의 공이 컸다.
환수된 지정문화재에서도 반가운 이름을 만날 수 있다. 28건의 지정문화재 목록을 살펴보면 보물 제569호 ‘안중근 의사 유묵-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이나 정조가 직접 그린 쌍폭(雙幅·한 쌍의 글이나 그림)으로 알려진 ‘정조필 파초도’(제743호) ‘정조필 국화도’(제744호)처럼 동국대 박물관이 소장한 유물이 6건이나 된다. 이 가운데 5건이 1970년에 환수됐는데 바로 초우 황수영 전 동국대 총장(1918∼2011)이 이룬 업적이다.
초우는 서산마애삼존불상과 문무대왕 수중릉, 울산 반구대 암각화 발굴에 관여했고 국립중앙박물관장과 동국대 총장을 지냈다. 한일 국교정상화회담 당시 문화재 반환협상의 실무대표로 활동하며 우리 문화재를 되찾는 데 관심이 컸다.
가장 대표적인 성과가 파초도 국화도를 포함한 유물 10여 점의 환수였다. 초우는 이를 소장하던 재일교포 장석 씨를 오랫동안 설득해 기증받았다. 이를 가지고 귀국하던 도중 밀수품으로 오인받아 압수당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정우택 동국대 박물관장은 “미술품 기증이란 인식조차 부족했던 시절에 어렵게 해외를 넘나들며 문화재 환수를 성사시킨 열정과 혜안이 대단했다”고 말했다.
문화재 93점의 반환을 성사시킨 고 조창수 전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 학예관(1925∼2009)도 잊어서는 안 될 공로자다. 1994년 북한에서 43년 만에 생환했던 국군포로 조창호 중위(1930∼2006)의 친누나인 조 학예관은 44년 동안 아시아담당 큐레이터로 일하며 한국문화를 해외에 알린 민속학자였다. 스미스소니언에 아시아 최초로 나라 이름을 사용한 ‘한국실’을 설치한 주역이기도 했다.
그가 환수한 대표적 문화재는 고종과 순종, 명성황후 옥보. 옥을 깎아 손잡이를 용 모양으로 만든 고종옥보(高宗玉寶)는 ‘황제’라고 새겨져 고종이 황제에 오른 1897년 이후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1987년 미국 경매에 나온 옥보를 발견한 그는 오랜 기간 소장자를 설득하고 모금운동을 펼쳐 유물을 되찾은 뒤엔 국립중앙박물관에 조건 없이 기증했다.
떠나는 모습도 아름다웠다. 암 선고를 받은 뒤 4억 원 상당의 미국 자택을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문화발전에 써 달라”며 스미스소니언에 기증했다. 그가 타계한 뒤인 2012년 유족은 평생 모은 연구자료 300여 점을 서강대에 기증했다.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은 최근 그의 업적을 널리 알리고자 동영상을 제작해 재단 홈페이지(www.overseaschf.or.kr)에 공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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