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잣거리에서 신발을 만들어 팔던 노비가 공신으로 임명되고 17년간 포도장(포도대장)으로 활약하며 도적을 소탕했다. 이 파란만장한 인생의 주인공은 경주 이씨 양반가의 지방 군수 이종직과 그의 시중을 들던 여종 사이에서 태어난 얼자(孼子·천인 여성이 낳은 아들) 이양생(1423∼1488)이다.
양생은 당시 법대로 어머니의 신분을 따라 노비가 되어 머슴살이를 했다. 가죽신이 유행하자 양생은 가죽신을 만들어 팔았다. 그는 저잣거리에서 백정을 비롯한 다양한 하층민과 어울렸다. 백정들은 소나 말을 도살한 뒤 얻은 가죽으로 물품을 만들었고, 활을 쏘고 말을 탔기 때문에 무예에도 능숙했다. 양생은 백정들에게 가죽신 만드는 법뿐 아니라 다양한 무예도 배워 훗날 활쏘기와 말타기, 격구에 능했다. 양생은 참판 윤보 집안의 여종을 아내로 맞았다. 학자 성현은 저술 ‘용재총화’에서 양생 부인의 외모에 대해 “추하고 비루하다”고 묘사했다. 게다가 아내가 자식을 낳지 못했음에도 양생은 아내를 끔찍이 아꼈다. 훗날 재상이 된 뒤 새 아내를 맞거나 첩을 들이라는 주위의 권유에도 그는 “내가 젊었을 때 빈곤을 같이했는데, 하루아침에 버리는 것은 옳지 못하다”며 거절했다.
신발 장사를 하던 양생에게 혼인은 뜻밖의 전환점이 됐다. 부인의 상전이던 윤보는 세조의 비 정희왕후의 조카였다. 수양대군(훗날 세조)은 1453년 계유정난을 일으키기에 앞서 측근과 무사, 천인들까지 끌어모았다. 이때 정희왕후 윤씨 집안의 친인척이 대거 참여했고 양생도 수양대군의 시종노비 중 한 명으로 가담했다.
세조는 즉위 후 노비 군대인 장용대를 설치했다. 36세였던 양생은 무예 시험을 거쳐 장용대에 합격했고, 1467년 이시애의 난이 일어나자 토벌에 참여했다. 그는 적진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공으로 공신이 되었다. 이후 겸사복 관직을 받아 왕의 옆에서 신변 보호와 왕궁 호위를 맡았다. 그의 첫 임무는 북악산에 출현한 호랑이를 잡는 일이었다. 당시 호랑이는 사람과 말을 물어 죽여 큰 골칫거리였다. 양생은 호랑이 잡는 장수로 명성을 날렸는데 ‘용재총화’에는 “매양 호랑이를 잡고 도적을 잡을 일이 있으면 조정에서는 이 사람에게 위임했다”고 나온다. 양생은 도적 잡는 일에도 두각을 나타냈다. 예종과 성종대에 걸쳐 도적이 끊이지 않자 1470년 조정은 양생을 포도장으로 임명했다. 양생은 경기 강원 황해 일대를 약탈한 도적을 잡은 공로로 정3품 당상관으로 승진했다. 이어 1472년 관악산에 진을 친 악명 높은 강도들을 잡아 종2품(조선시대 18품계의 벼슬 중 네 번째 품계) 가선대부로 승진함으로써 드디어 재상이 됐다.
양생은 죽기 두 해 전까지 장장 17년간 포도장을 지냈다. 도적을 잡는 남다른 능력 덕분이었다. 그는 저잣거리에 떠도는 정보망을 적극 활용했다. 옛 백정 친구들로부터 많은 정보를 입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재상이 된 뒤에도 장터를 지나다 옛 친구를 만나면 반드시 말에서 내려와 회포를 푼 다음에야 길을 떠났다. 끝내 글을 배우지 못해 더 높은 관직을 얻진 못했지만 그는 의리와 인간미를 갖춘 진정한 조선의 ‘훈남’이었다.
강의=심승구 한국체대 교양교직과정부 한국사 교수 정리=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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