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상적 말과 물건이 제 용도에서 벗어나 이질적이고 묘한 긴장관계를 맺는다. 이동식 철제 펜스와 연결된 나무판자에 ‘거기가 어디든 화요일 한 시 북쪽 창문을 찾아 반쯤 열고 한가운데 서서 기다려라’ 같은 알쏭달쏭한 문구가 담겨 있다. 모서리에 기댄 책꽂이의 등판은 뚫려 있고, 돌로 괸 양동이 바닥에는 물의 흔적이 남아 있다. 》
서울 세종로 일민미술관에서 열리는 정서영 씨(49)의 ‘큰 것, 작은 것, 넓적한 것의 속도’전은 까다로운 난해시를 입체 공간으로 옮겨 온 것 같다. 쉽게 설명하거나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지 않고 표현하지 않은 채 무심하게 제시한 작품이 관객을 당황하게 만들지만 그래서 지루하지 않다. ‘깊고 진지하다’는 마니아층의 찬사를 받으면서도 의미 전달과 의도적 거리를 둔 작업으로 ‘어렵다’는 꼬리표가 늘 따라다니는 작가의 두 얼굴을 각자의 잣대로 평가하는 자리다.
서울대 조소과 졸업 후 독일에서 공부한 정 씨는 1990년대 동시대 미술의 본격 출발을 알리는 활동으로 이름을 알리고 2000년 ‘전망대’전을 통해 현대미술의 주목받는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이번 전시에선 조각 드로잉 영상 등 알찬 신작이 대거 선보였다. 언어와 사물의 이면을 통찰한 작업이라 쉽게 곁을 내주진 않아도 평범한 사물로 비현실적인 세계를 빚어 낸 작가의 솜씨는 호기심을 자극한다. 11월 17일까지. 1000∼2000원. 02-2020-2050
○ 조각의 침묵
백색 형광등 아래 날것으로 모습을 드러낸 사물들은 다양한 장르와 매체에 걸쳐 조각의 형식을 파괴하고 상투적 해석에 도전한다. 배우의 몸과 오브제가 어우러진 퍼포먼스 영상은 조각적 형태를, 무릎에 흙탑을 얹은 남자가 탑을 유지하기 위해 자세를 잡는 순간을 포착한 사진들은 조각적 현실을 다룬다. 벽에 콘센트를 설치해 긴 전선과 원형 오브제를 연결한 작업은 조각적 오브제로 영역을 확장한다.
정적이고 물리적인 덩어리 대신 ‘조각’이 이뤄지는 상황이나 순간을 미학적 세계로 끌어안은 작품들이다. 김현진 학예실장은 “말과 언어를 통해 지시된 사물 사이의 관계를 근본적으로 재고하게 만드는 것이 그의 작업”이라며 “조각가로서의 사유와 그 면모에 집중한 이 전시는 조각의 침묵 속에서 조각의 행위를 보고 듣는 시간”이라고 소개했다. ‘조각을 한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으로 조각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를 주목한다는 의미다.
○ 작가의 침묵
개막식이 열린 12일 오후, 화장기 없는 말간 얼굴의 작가는 다리를 다쳐 깁스를 한 채 2층 로비에 앉아 있었다. 전시장은 안규철 박찬경 김범 정은경 씨 등 미술계 인사들과 남편 아들 등 가족 친지들로 북적였다. 오프닝 내내 차분한 표정의 작가는 작업에 과도한 의미 부여와 획일적 해석을 경계하려는 듯 작업의 맥락이나 의미에 대해 말을 덧대지 않았다. 작품도 그렇지만 전시 제목도 수수께끼를 남긴다. 작가는 “작품과 같은 성질이면서 작품을 가둬 놓지 않을 수 있는 상태”의 제목을 선호한다고 말한다.
친숙함과 낯선 것, 기념비적 조각과 볼품없는 물건들, 현실과 비현실의 어슴푸레한 경계에 대한 진지한 접근이란 점에서 작업의 존재감이 느껴진다. ‘말과 사물을 조감도처럼’ 들여다보면서 표면과 그 아래를 신중하고 유쾌하게 통찰하는 전시다. 27일 오후 4시 작가의 생각을 들어보는 아티스트 토크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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