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21대 왕 영조의 둘째 딸 화순옹주(1720∼1758)는 조선 왕실 여성 중 유일하게 남편을 따라 죽은 ‘열녀’다. 그는 남편인 월성위(月城尉) 김한신(1720∼1758·추사 김정희의 증조부)이 병으로 죽자 곡기를 끊고 14일 만에 따라 죽었다. 영조가 화순옹주의 집에 찾아와 미음을 먹으라고 권했지만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
화순옹주의 조카인 정조는 고모의 사후 25년인 1783년 고모의 정절을 기리며 월성위 부부의 무덤이 있는 충남 예산에 열녀문(화순옹주 홍문)을 세웠다. 정조는 당시 “부부의 의리를 중히 여겨 같은 무덤에 묻히려고 결연히 뜻을 따라 죽기란 어렵지 않은가. … 어찌 우리 가문의 아름다운 법도에 빛이 나지 않겠는가. … 아! 참으로 어질도다”라고 칭송했다.
하지만 그의 자살은 남편에 대한 정절보다는 불행했던 가족사 때문으로 봐야 한다는 주장이 나왔다. 김지영 서울대 비교문화연구소 연구원(문화인류학)이 최근 한국여성사학회 월례발표회에서 발표한 논문 ‘18세기 화순옹주의 자살에 대한 생애사적 성찰: 죽음과 결핍의 가족사’에서다.
화순옹주의 어머니는 영조의 첫 후궁 정빈 이씨다. 정빈 이씨는 화순옹주를 낳고 이듬해 27세의 나이에 병으로 죽었다. 화순옹주는 젖먹이 때부터 어머니의 보호 없이 궁궐 생활을 견뎌야 했다. 친언니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첫돌도 안 되어 죽었기 때문에 만난 적이 없고, 한 살 터울인 친오빠 효장세자는 아홉 살에 요절했다. 게다가 효장세자는 여섯 살에 왕세자로 책봉되면서 서로 떨어져 살아 화순옹주와 오누이의 정을 나눌 시간도 없었다. 아버지 영조가 딸 7명 중 화순옹주를 특히 예뻐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다른 혈육의 부재를 상쇄하긴 어려웠다는 게 김 연구원의 설명이다.
가뜩이나 외로웠던 왕궁에서 1730년 열 살이던 화순옹주의 불안을 가중시키는 사건이 일어났다. 순정이라는 궁인이 동궁 나인으로 뽑히지 못한 것에 앙심을 품고 정빈 이씨와 효장세자를 저주하며 이들의 죽음에 깊이 간여했음이 드러난 것이다. 또 화순옹주가 홍역에 걸렸을 때 순정이 몰래 독약을 먹여 죽이려 했음이 밝혀졌다.
화순옹주는 2년 뒤 열두 살 나이에 동갑내기 월성위와 혼인해 남다른 부부애를 과시했다. 하지만 화순옹주의 불임으로 둘 사이엔 자식이 없었다. 조선 여성에게 불임은 어머니로서의 정체성뿐 아니라 아내와 며느리로서의 정체성마저 불완전하게 만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남편이 죽자 화순옹주는 가족의 결핍을 극복하지 못하고 스스로 죽기로 결심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게 김 연구원의 설명이다.
김 연구원은 “18세기 조선에 남편을 따라 자살한 여성이 증가했는데, 이에 대해 ‘열녀’라는 정체성을 부여해 여성의 자살을 장려하는 사회 분위기마저 생겼다”며 “이들이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던 고단한 삶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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