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의 가면을 덧쓴 사악한 어른들이 천진한 어린이의 마음에 멍 자국을 남기는 일이 종종 벌어진다. 주인공인 열두 살 소녀 엘린 역시 그런 희생자다. 하지만 아픔과 상처에서 벗어나기 위해 힘겹게 싸움을 벌인다. 스웨덴 태생의 작가는 흑백그림 안에 담담하게 엘린을 담았다. 그래픽 노블 형식이어서 글은 많지가 않다.
엘린은 외로운 아이다. 친구가 없어서 숲이나 부둣가에서 혼자 논다. 바쁜 엄마 아빠는 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틈이 없다. 하지만 엘린은 배를 드러내고 버둥대는 작은 벌레를 바로 놓아 주고, 올해 처음 핀 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는 감수성 풍부한 소녀다.
엘린은 우연히 인터넷 사이트 ‘젠 파이팅’에서 동양무술 지도자 안드레와 채팅을 하게 된다. 외로움을 이해한다면서 접근해 오는 안드레에게 엘린은 마음을 열지만 성폭행을 당하고 만다. 작가는 안드레의 얼굴 전체를 의도적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눈이나 입, 뒷모습, 실루엣으로 표현해 엘린의 불안감을 나타낸다. 그 대신 안드레의 옷에 새겨진 용 문양 자수가 안드레의 분신처럼 악몽 속에서 엘린을 괴롭힌다.
엘린의 변화를 감지한 것은 학교 선생님이다. 구체적 내용은 감춘 채 혼란스러운 마음을 털어놓는 엘린에게 선생님은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넣어 준다. “엘린, 네가 실제로 얼마나 강한지 보여 줘라!” 이런 주변의 관심과 애정이 엘린을 서서히 변화시킨다.
괴로운 소녀의 무의식 세계를 상징하는 바다 밑에서 징그러운 식물들이 용처럼 엘린을 공격하고, 엘린은 이들을 모두 처치한 뒤 흰색 기구를 타고 지상의 풀밭에 안전하게 착륙하는 상상을 한다. 마음 속 괴물들을 모두 물리친 것이다.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라는 내용을 다뤘다는 점에 부담을 가지지 않아도 될 듯싶다. 자극적이거나 격정적이기보다는 절제 속에 온기가 느껴진다. 어두운 현실 아래 절망에 빠진 어린이들을 돕고 격려하는 방법을 고민하게 만든다. 지난해 스웨덴 문학상 ‘아우구스트상’ 아동 부문 최종 후보작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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