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사회 조선시대 개천에서 용이 된 남자들]<4·끝>영욕의 문필가 송익필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9월 3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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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과 학문토론한 서얼출신 대학자… 김장생-송시열에 영향

구봉 송익필(龜峯 宋翼弼·1534∼1599)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 율곡 이이, 우계 성혼과 마음을 터놓고 사귄 친구였다. 세 사람은 토론을 통해 서로의 학문을 발전시켰고 이들이 주고받은 편지는 서간첩 ‘삼현수간’으로 남아 있다. 그는 또 정치가이자 사상가인 사계 김장생을 기른 학자이며 소문난 문필가였다.

그런 그는 왜 이이나 성혼에 비해 덜 알려졌을까. 미천한 신분과 부친의 잘못이 결정적 이유였다.

젊은 시절 송익필은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했으나 친할머니가 서녀(첩이 낳은 딸)라서 출신이 미천하다는 이유로 과거시험을 볼 수 없었다. 결국 27세 무렵 과거 응시를 포기하고 경기 파주의 구봉산 자락으로 거처를 옮겨 학문에 전념했다. 이 즈음 김장생을 첫 제자로 맞았고, 30대에는 이이, 성혼과 학문적 토론을 이어갔다.

송익필은 사단칠정(四端七情)이 모두 ‘이기가 발현된 것(理氣之發)’이며 인심도심(人心道心)도 모두 ‘일심이 발현된 것(一心之發)’이라고 하여 사단과 칠정, 인심과 도심이 상대적이기보다 서로 연관된 관계라고 보았다. 또 주자가례의 원칙에 충실한 예학사상을 주장했다. 그의 성리학 이론과 예학은 김장생과 송시열에게 전해져 서인의 사상적 근거를 마련했다.

그런데 송익필은 50대에 노비가 되어 도망자로 숨어사는 우여곡절을 겪는다. 그의 아버지 송사련이 저지른 잘못이 발단이었다.

판관 송사련은 1521년 모반 사건을 조작해 중종에게 고발했다. 좌의정을 지낸 안당의 아들인 안처겸이 “간신들을 제거해야 한다”는 모의를 했다는 것. 이 밀고로 안당과 안처겸 안처근 형제는 처형되고 안당 집안은 쑥대밭이 됐다. 밀고의 대가로 송사련은 당상관으로 초고속 승진하고 부귀영화를 누리며 생을 마쳤다. 송사련이 안당 집안 노비의 후손이기에 노비가 주인집을 배신한 것과도 같았다.

안씨 집안 사람들은 60여 년 전에 일어난 이 밀고가 잘못됐음을 밝히고 송익필 가족이 안씨네 노비였음을 입증하는 소장을 냈다.

송사련과 송익필 2대에 걸쳐 양인 호적을 인정받았음에도 송익필과 그의 형제, 자손들은 노비로 환천(還賤)되었다. 안씨네 노비로 들어가야 하는 상황에서 송익필 가족은 죽기 살기로 도망쳤다.

이후 동인과 서인 사이의 정치적 소용돌이 속에서 송익필은 구속과 석방, 귀양으로 굴곡진 삶을 살았다. 그는 말년에 충청도 당진에서 은거하며 묵묵히 학문을 이어갔다. 그는 사후 영조 때 신원돼 사헌부 지평의 관직에 추증됨으로써 노비의 멍에를 벗었다.

강의=정재훈 경북대 사학과 교수   
정리=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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