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서울에서 공연한 연극 ‘빅토르 혹은 권좌의 아이들’에 출연한 엘로디 부셰(아래). 그는 “거짓말과 비밀, 긴장과 혼란으로 가득한 캐릭터를 무대 위에서 몸으로 표현하는 과정을 통해 비할 바 없는 행복을 느꼈다”고 말했다. 한국공연예술센터 제공
프랑스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별들 중 하나가 지난주 조용히 서울을 다녀갔다. 배우이자 모델인 엘로디 부셰(40). 1998년 ‘천사들이 꿈꾸는 세상’으로 칸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스타다. 그는 미국 TV 시리즈 ‘앨리어스’ ‘L워드’에 출연할 즈음 세계적인 패션디자이너 마크 제이컵스가 흠모하는 모델로 알려져 유명해지기도 했다.
부셰는 26일까지 열리는 서울국제공연예술제 개막작인 연극 ‘빅토르 혹은 권좌의 아이들’ 공연을 위해 1일 처음으로 한국을 찾았다. 연극은 이번이 세 번째. 그는 “공연에만 집중하고 싶다”며 인터뷰 요청을 모두 거절했다.
2∼4일 4회의 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떠난 부셰가 기자의 e메일을 읽고 회신을 보내왔다. 패션 아이콘답지 않게 펑퍼짐한 면바지 차림으로 지하철을 타고 서울의 가을을 경험한 부셰는 “완벽하다고밖에 달리 할 말이 없는 날씨였다”고 했다.
“리허설 일정이 빠듯했지만 숙소였던 서울 종로구 인사동 주변을 짬짬이 걸어 다녀 봤어요. 시간이 너무 짧더군요. 조만간 다음 영화를 들고 꼭 다시 오고 싶습니다.”
연극 ‘빅토르…’는 키가 180cm인 아홉 살 소년의 조로(早老)한 시선을 통해 현대사회 가족제도의 허위를 풍자했다. 부셰는 이웃집 여인과 바람난 남편 때문에 고통 받는 빅토르의 어머니 에밀리 역을 맡았다. 어린이인 척하지만 이미 어른들 삶의 추잡한 뒷동네 사연을 간파해버린 아들도 에밀리의 삶을 위태롭게 뒤흔든다.
―두 아들의 어머니인 당신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어린이의 눈이 맑고 순수할 수만은 없지 않을까요.
“글쎄요. 아이들은 나름의 방식으로 어른들의 세계를 탐험해 알아갑니다. 부모는 아이들이 무엇을 어떻게 알아내고 있는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어요. 자신들도 분명 한때 아이들이었는데 말이죠. 내 경우는 어렸을 때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고 바라지 않았어요. 어린아이인 상태를 행복하게 만끽했습니다.”
―극 속 이야기는 마른 나무덩굴이 무겁게 드리운 무대 이미지처럼 내내 황량하죠. 로제 비트라크의 희곡은 20세기 초 파리 부르주아 사회의 위선을 풍자했습니다. 100년이 지난 요즘 세상은 그때에 비해 조금은 나아진 걸까요, 아니면 더 참혹해진 걸까요.
“유사 이래 가족이라는 시스템과 그것을 둘러싼 이야기 안에는 언제나 어느 정도의 세속적 부정(不淨)과 비밀이 숨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속내야 어찌됐든 멀쩡해 보이는 겉모습을 일단 어떻게든 유지해놓고 보려는 노력…. 이 세상의 모든 가족, 모든 사람이 언제나 애쓰고 있는 일 아닐까요.”
―관객으로 이 연극을 본 적이 있나요.
“아뇨. 하지만 그래서 더 순수한 마음으로 이야기에 접근할 수 있었습니다. 이 작품은 프랑스에서 나온 첫 초현실주의 연극이에요. 흥미로운 도전과 탐험이 될 것이라 확신했습니다.”
―당신은 출연작에서 주로 젊고 섹시한 ‘욕망의 대상’ 역을 해왔습니다. 남편에게 배신당하는 어머니 역할이 어쩐지 어울리지 않다는 느낌도 드는데…. 몰입에 어려움은 없었나요.
“처음 출연을 제안 받았을 때 철부지 이웃집 소녀 역도 고를 수 있었어요. 제 삶의 경험에 비추어 분석하고 이해하기가 좀 더 쉬운 역할이었죠. 하지만 에마뉘엘 드마르시 모타 연출과 이심전심 결정한 선택은 ‘도전’이었습니다. 지나고 보니 정말 다행스러워요. 더없이 행복한 성찰이었으니까요.”
―드마르시 모타 연출과는 4년 전 ‘카지미르와 카롤린’ 이후 두 번째 작업이죠. 이번 투어 공연을 위해 영화 촬영 일정을 취소했다고 들었습니다.
“그와의 만남은 저에게 신의 계시와 다름없어요. 그는 연극무대 출신이 아닌 저를 있는 그대로 신뢰해줍니다. 극단에서의 경험은 늘 최고조의 쾌감을 안겨줘요. 물론 저는 영화 일도 사랑합니다. 사실, 영화 없이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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