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선친께 시호를 ‘장헌(莊獻)’으로 올리고 궁은 ‘경모(景慕)’, 원(園)은 ‘영우(永祐)’로 하여 종백신(예조판서)으로 하여금 모든 의식을 그에 맞게 정하도록 하였다. … 이렇게 하는 소자의 마음을 아버님의 영령께서 알아주시기를 바랄 뿐이다. 숭정 이후 세 번째 병신년(1776년) 피눈물로 삼가 인(引)을 쓴다.”(‘경모궁의궤’ 중에서)
1776년 왕위에 오른 정조는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고 선포하며 아버지에 대한 추숭 사업을 본격화했다. 즉위 열흘 뒤인 3월 20일 사도세자에게 장헌이라는 시호를 올리고 사도세자의 사당이던 수은묘가 너무 궁색하다며 고쳐 세울 것을 명하면서 이름을 경모궁으로 바꿨다. 조선시대에는 즉위하기 전에 죽은 왕세자의 신주는 종묘에 배향하지 않고 별도의 사당을 마련해 제사를 지냈다. 1784년에는 경모궁에 관한 기록과 의식을 정리한 ‘경모궁의궤’가 발간됐다.
조선왕조의궤 번역 사업을 하는 한국고전번역원은 최근 ‘경모궁의궤’(사진)를 우리말로 처음 번역 출간했다. 의궤에는 경모궁 개축에 따라 조성된 건물 악기 제기의 그림과 설명, 경모궁에서 행하는 제사에 대한 규정, 사도세자의 출생부터 세자 책봉, 입학, 가례, 대리청정의 과정, 경모궁의 각종 제도와 운영 상황이 기록돼 있다. 이를 통해 생부의 복권을 통해 왕통의 권위를 높이려 했던 정조의 의지와 조선시대 왕실 의례를 구체적으로 살필 수 있다.
경모궁은 지금의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본관 뒤편에 있었다. 1899년 사도세자가 장종(莊宗)으로 추존되어 왕의 신분을 갖게 되면서 신주가 종묘로 옮겨진 뒤 경모궁은 사당으로서의 기능을 잃었다. 1924년 경모궁이 세워진 함춘원(창경궁의 후원) 일대에 경성제국대 의학부가 들어서면서 경모궁의 일부 건물을 빼고는 본모습을 잃었다. 나머지 건물마저 6·25전쟁 때 불타 지금은 석단과 함춘문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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