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무기를 만든 최초의 이유는 자연과의 투쟁, 바로 사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석기시대에 돌을 깨거나 갈아서 창날을 만들고 화살촉을 만들어 인간보다 강한 동물을 사냥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정착 생활을 하고, 가축을 직접 키우는 방식으로 삶의 방식이 바뀌면서 생존을 위한 사냥은 군사·정치적인 목적의 전투로 변화하게 된다. 특히 국가라는 거대한 조직체를 만들고 군대라는 합법적인 무장집단을 양성하면서 사냥은 그들을 집단화시키고 훈련시킬 수 있는 최고의 무예수련 방법이 됐다. 인간끼리 다툰 전쟁은 인간과 동물이 펼친 사냥의 또 다른 형태였다.
최고의 실전 기병훈련은 사냥
화약무기가 전장을 휩쓸기 전까지 말을 탄 기병(騎兵)은 최고의 전투력을 보였다. 강력한 돌파력과 적의 머리 위에서 공격하는 유리한 위치는 기병만이 갖는 장점이었다. 여기에 적에게 엄청난 공포심까지 유발시킬 수 있었기에 기병은 전장의 꽃이자, 전투력의 상징이었다.
기병은 늘 말과 함께 움직여야 했기에 평시에도 자신들이 타던 전투마와 호흡을 맞춰야만 전장에 쉽게 적응할 수 있었다. 그래서 평상시 기병들은 자신의 전투마와 함께할 수 있는 무예훈련으로 사냥을 즐겼다. 말을 타고 달리며 활을 쏘는 기사(騎射)는 적을 원거리에서 사살할 수 있는 중요한 기술이었는데 사냥은 이를 훈련하기에도 적합했다. 조선시대 국왕을 최측근에서 호위했던 금군(禁軍)은 상시적으로 동물들을 사냥하면서 전투력을 유지했다. 또 착호군(捉虎軍)이라는 호랑이 사냥을 전문으로 하는 특수부대를 만들기도 했다.
기병, 달리는 말 위에서 공을 쏘다
조선시대 기병들이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무예를 훈련하기 위해 썼던 방법이 ‘사구(射毬)’다. 이름처럼 말 위에서 움직이는 공을 향해 쏘는 일종의 모의 사냥 훈련이었다. 특히 공의 움직임과 속도를 거의 살아 있는 동물과 같게 하기 위해 말을 탄 기병이 앞에서 줄에 매단 커다란 공을 끌고 달려가면 뒤에서 쫓아가는 기병이 이를 공격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공이 이리저리 통통 튀며 요동을 쳐 진짜 살아있는 동물 사냥을 능가하는 스릴을 느낄 수 있었다.
사구를 할 때는 사람이 다치는 걸 막기 위해 날카로운 촉을 제거하고 끝 부분에 솜을 둥글게 말고 무명으로 씌운 무촉전(無鏃箭)이라는 화살을 사용했다. 또한 화살의 깃은 일반 화살보다 두 배 이상 넓은 것을 달았는데 근접거리에서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한 형태였다. 이러한 사구가 펼쳐지는 날이면 주변에 있는 군사들이 모두 모여 화살 한발 한발에 촉각을 곤두세웠고 명중할 땐 함성을 지르기도 했다. 이처럼 사구는 관람용 스포츠의 역할도 했다.
‘서바이벌 게임’을 거쳐 ‘정치적 도구’까지
사구 외에 ‘삼갑사(三甲射)’라고 하여 기병대 간의 전투를 상정해 직접적으로 화살세례를 가하는 방식의 무예훈련도 있었다. 갑,을, 병 세 조로 군사를 나눠 각각 갑은 을을, 을은 병을, 병은 갑을 공격하는 형태로 규칙을 정해 훈련했기에 서로 쫓고 쫓기며 다양한 형태의 전술훈련이 가능했다. 여기에도 화살촉을 없앤 무촉전을 썼다. 활을 맞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활 앞에는 두꺼운 가죽으로 끝을 씌우고 거기에 붉은 색 물감을 묻혀 쐈다. 훈련이 끝난 후 상대방 갑옷에 묻은 붉은 점의 개수에 따라 점수를 줘 이긴 조에는 좋은 활과 화살이나 전투마를 선물로 주기도 했다. 요즘 예비군 훈련장에서 물감이 터지는 탄알로 진행하는 서바이벌 게임이 조선시대부터 있었던 것이다. 화살촉을 제거한 상태로 쏘긴 했지만 그 충격이 셌기 때문에 반드시 갑옷을 입은 후에 훈련을 진행했기에 일반적인 전투훈련보다 몇 배는 힘든 기병 훈련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사냥 훈련이 정치적으로도 활용됐다. ‘강무(講武)’라 하여 국왕이 군사들과 어우러져 직접 사냥을 하는 의례까지 있었다. 강무 의례를 진행할 때에는 적게는 수백 명, 많게는 수만 명의 군사를 특정 지역에 매복시키거나 진형을 갖춰 몰이를 하고 사냥을 했기에 그 자체로 웬만한 전투를 능가하는 규모였다. 이런 대규모 사냥을 통해 왕은 군사를 통솔하고 자신의 위세를 드러내는 데 활용했다. 이렇듯 자연과의 투쟁 속에서 펼쳤던 사냥은 그 자체로 훌륭한 무예·군사 훈련이었다. 이후 스포츠, 정치적인 도구로까지 진화했다. 생존을 위한 본능, 그리고 무예는 정치·스포츠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임을 사냥을 통해 다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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