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사간동 금호미술관 1층에 광목천이 겹겹이 매달려 있다. 작가는 낙동강 보에 닿을 듯 말 듯 흰 천을 걸어 놓았을 뿐 나머지는 강물이 완성한 풍경이다. 2층에는 ‘쏴’ ‘그냥 폭포’ 등 즉흥적 붓질로 팽팽한 긴장감을 길어 올린 글씨작품이 걸려 있다. 글자를 기호이자 조형적 요소로 풀어낸 그림이다. 지하층엔 빛과 공기를 투과하는 한지로 만든 큐브 설치작품, 동양의 정신성을 서양 매체(아크릴물감)로 풀어낸 캔버스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 모든 작업은 한국화가 김호득 씨(63·영남대 교수)가 ‘겹-사이’전에서 선보인 작품이다. 그는 실제적 대상을 그린 초기 작업에서 1990년대 후반 이후 점과 획을 현대적으로 접근한 ‘점찍기’ ‘선그리기’ 등 수행적 작업을 통해 추상적 개념적 세계로 옮겨왔다. 이번 전시에서는 전통 지필묵 작업에 대한 탄탄한 이해를 바탕으로 동양화의 경계를 확장해 온 작가의 결실을 모았다.
전통적 묵법과 파격적 실험을 오가며 묵직하게, 때론 위트를 담아 한국화의 변용을 모색한 작품들이 흥미롭다. ‘겹’의 개념으로 동양과 서양미술의 차이를 들여다보거나 나와 너, 공간과 평면, 빛과 어둠의 ‘사이’를 파고든 작품들이다. 먹물을 푼 대형 수조 위에 한지를 매달아 만든 공간 드로잉 설치작품은 은은한 먹 향기로 시각과 후각을 사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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