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정운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한국사회의 반(反)지성주의와 교육만능주의를 ‘저주’라고 표현하며 안타까워했다. 많은 청소년이 지옥 같은 입시 경쟁을 겪지만 정작 대학에 들어와서는 무엇을 배울지 관심이 없고, 사회 전반적으로 진지한 학문 연구를 권장하는 풍토도 없다는 것이다.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
1999년 출간된 ‘오월의 사회과학’(오월의봄)은 5·18민주화운동을 생생하게 복원하고 분석한 명저로 호평을 받으며 지금도 대학생과 지식인의 필독서로 널리 읽힌다. 그 저자인 최정운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60)가 14년 만에 신간을 냈다. ‘한국인의 탄생’(미지북스).
이 책은 근대 한국인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방법으로 한국 근대소설에서 창조된 홍길동 성춘향 임꺽정 이형식 구보 같은 인물들을 분석했다. 문학평론가가 쓴 것처럼 각 작품과 작가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이 돋보인다. 5·18에 천착했던 정치학자가 뜻밖에 문학에 14년을 쏟아 부은 연유가 궁금해 16일 서울대의 연구실을 찾았다.
젊은 시절 문학청년이었거나 소설가를 꿈꾸었는지부터 묻자 그는 고개를 내저었다. “1990년대 중반 전공 공부를 하다가 문학의 중요성을 깨달았어요. 특히 소설에는 당대의 정치 사회상은 물론이고 그에 대한 작가의 생각도 반영돼 있기 때문이죠.”
서울대 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시카고대에서 정치학 석·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외국의 선진이론을 배워와 한국사회에 적용해가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한국사회의 근본적 문제가 외국 이론으로는 결코 해결되지 않음을 깨닫고 한국인의 정체성을 찾는 작업에 몰두하게 됐다. 사상사적 자료는 너무 부족했다. 그 대안이 소설이었다. 책에서는 일제강점기에 이인직 이해조 신채호 이광수 김동인 나도향 박태원 이상 홍명희 등이 세상을 어떻게 인식했고 어떤 인물들을 창조했는지 분석했다.
최 교수는 근대 한국인의 전형에 가장 가까운 인물로 이광수 소설 ‘무정’의 주인공 이형식을 꼽았다. “이형식은 선형과 약혼해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온 뒤 조선의 지도자가 되겠다고 말합니다. 겉으론 민족과 개화라는 대의명분을 내세우면서 속으론 입신양명과 계급상승을 꿈꾼다는 점에서 근대 한국인의 전형을 보여줍니다.”
최 교수는 “한국인은 계속 변해왔기에 ‘전형적인 한국인’이라는 것은 신화일 뿐”이라면서도 “한국인이 정말 독하게 살아온 것만은 확실하다”고 말했다. 독이 바짝 올랐기에 광복과 산업화,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다는 얘기다.
한국 전통 가무악에서 느껴지는 에너지도 한국인만의 독특함이라고 설명했다. “제 딸(28)도 판소리를 하는데, 여성이 그렇게 힘 있게 꽥꽥대며 노래하는 장르를 다른 나라에선 찾아보기 어려워요. 조선사회가 전통예술을 통해 민중에게 자유를 주었던 거죠.”
그는 “5·18은 우리 역사의 전형을 벗어난 사건”이라고 자주 말해왔다. 근대 한국인의 정체성을 연구하면서, 5·18이 가능했던 실마리를 얻었을까. “전통적으로 한국인에겐 인간 존엄성에 대한 존중이 뿌리박혀 있습니다. 성리학이 지배하던 조선은 신분제를 정당화한 봉건사회였지만 한편으론 개인의 도덕성과 존엄성을 국가와 학문의 궁극적 목적으로 보았지요. ‘춘향전’에도 인간의 존엄성이 밑바탕에 깔려 있고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한국인의 각별한 감각이 5·18의 에너지로 분출됐다고 봅니다.”
그는 후속편으로 광복부터 최근까지의 소설과 드라마, 영화를 통해 현대 한국인의 정체성을 탐구하는 책을 2년 뒤쯤 낼 예정이다. 손창섭 최인훈 김승옥 하일지 박민규의 작품을 분석하고, ‘사랑이 뭐길래’ ‘모래시계’ ‘대장금’ 같은 드라마와 영화도 분석 대상이다.
환갑을 맞은 이 학자의 오랜 화두는 한국 민족주의다. “한국 민족주의는 1970년대까지 개화민족주의였다가 1980년대부터 저항민족주의로 완전히 달라집니다. 두 갈래 민족주의가 나선을 이루며 싸워온 양상을 봐야 민족주의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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