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공기 승무원의 인사말은 이례적이었다. 안내 방송이 끝나자 138명의 승객은 일제히 박수와 함성을 터뜨렸다. 16일 오후 9시 어둠이 깔린 부산 김해공항 활주로에서 사이판으로 떠나는 아시아나항공 OZ 607편이 서서히 움직이려던 순간이었다.
155석 규모의 이 항공기 좌석은 온라인 골프 동호회인 네이버 카페 ‘클럽 카메론’ 회원으로 채워졌다. 항공편 하나를 7500만 원을 들여 통째로 빌린 이들은 17일부터 사흘간 사이판의 명문 라오라오베이 골프 앤드 리조트에서 자체 정기 라운드 행사에 나섰다. 36홀 코스 중 18홀에는 다른 고객은 받지 않은 채 이들 회원에게만 개방됐다. 카페 회장 격인 김기인 매니저(47)는 “5년을 준비했는데 마침내 꿈이 이뤄졌다”며 다른 회원들과 하이파이브를 나눴다. 워낙 ‘대부대’가 이동하다 보니 탑승 수속도 쉽지 않았다. 140개 가까운 캐디백이 빼곡히 들어찬 출국장은 장관이었다. 보통 25kg이 넘는 캐디백을 회원 수만큼 부치려면 항공기 두 대는 필요하다는 항공사 측 설명에 회원들은 짐의 무게와 개수를 최대한 가볍게 하려고 진땀을 흘렸다. 골프에 미치고 사람에 빠지고
클럽 카메론은 2007년 1월 출범했다. 미국의 명문 수제 퍼터로 유명한 ‘스코티 카메론’을 국내 시장에 유통시킬 의도였다. 하지만 동호회의 지나친 상업성을 지적받으면서 출범 6개월 만에 문을 닫을 위기에 빠졌다. 동호회 창립 회원이기도 한 김 매니저는 “골프뿐 아니라 회원들의 희로애락을 담은 놀이터 공간으로 변모하면서 큰 호응을 얻었다”고 말했다. 출범 초기 13명이던 회원은 17일 현재 4만275명으로 늘어났다. 6개월 이상 접속하지 않는 회원들을 해마다 3000명 정도씩 정리했던 것을 감안하면 10만 명 돌파도 진작 가능했다. 회원 수 경쟁에 뛰어들기보다는 내실을 기하겠다는 뜻이다.
이 동호회는 골프와 관련된 정보 교류뿐 아니라 회원들의 인생 상담까지도 활발하게 이뤄지면서 높은 관심을 끌었다. 온라인뿐 아니라 오프라인에서도 정기 골프 모임, 전체 회원 대상 오픈대회뿐 아니라 ‘번개 모임’을 통해 친밀도를 높였다. 전국에 6개 지부를 두고 있으며 회원의 화합을 위해 지역색 배제의 원칙을 강조하고 있다. 지난달 충북 충주 센트리움CC를 빌려 치른 오픈대회에는 260여 명의 회원이 참가했는데 참가 신청을 받은 지 1분 만에 마감됐다.
동호회가 활성화되면서 이들이 사이버 공간에서 주고받는 골프 클럽과 골프장 정보들은 골프 업계에서도 민감한 사안이 될 정도였다. 한 회원은 “업체 관계자들이 우리 회원으로 가입해 동향을 파악하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이번 행사에는 국산 골프공 업체 볼빅이 5000만 원을 지원하기도 했다.
동호회는 자체 제작한 캐디피 봉투를 회원들에게 사용하도록 유도하는 등 골프 문화 향상에도 신경을 썼다. 연말이면 회원들이 제공하는 안 쓰는 골프 클럽을 경매에 내놓아 마련한 기금으로 장애 어린이, 홀몸노인 등 불우이웃을 돕는 데도 소매를 걷어붙였다. 김 매니저는 “동호회 창립 10주년이 되는 2017년 1월 전세기를 빌려 미국의 명문 골프장인 페블비치에 단체 투어를 가고 싶다”고 밝혔다.
잘 치면 마음이 즐겁고, 못 쳐도 눈은 즐거워
이번 사이판 행사에는 국내뿐 아니라 중국, 태국, 미국의 회원까지 참석할 만큼 열기가 높았다. 18개 홀에서 동시 티오프하는 샷건 방식으로 진행된 3일간의 라운드에는 70대의 카트가 차례로 클럽하우스를 떠나는 진풍경을 연출했다. 회원들은 오프라인처럼 골프장에서도 실명 대신 개성을 드러내는 닉네임을 사용하며 세대와 성별을 떠나 격의 없이 어울렸다. 호주의 ‘백상어’ 그레그 노먼이 설계한 골프장은 ‘신이 던져 놓은 코스’라는 평판이 나올 만큼 산과 바다를 바라보는 천혜의 환경을 지녔다.
회원들은 아찔하게 솟아 있는 검은색 기암절벽과 흰색의 파도 거품을 쏟아내는 아기자기한 해안선을 바라보며 연방 감탄사를 터뜨렸다. 티샷을 일부러 바다를 향해 날려보는 잊지 못할 추억을 만드는 회원도 있었다. 특히 코스 왼쪽으로 바다를 끼고 플레이하는 동코스 4∼6번홀에서는 절묘한 풍광을 카메라 렌즈에 담아 내는 데 바빠 보였다.
이날만큼은 스코어는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았다. 미국 버지니아 주 비에나에 살고 있는 재미교포 김희정 회원(48)은 “경치에 취해 공을 어떻게 쳤는지 까먹었다”고 말했다. 삼성중공업 임원 출신으로 행사 최고령 참가자인 손득남 회원(60)은 “소풍 온 어린이가 된 것 같다. 뛰어난 경치 속에 좋은 후배들과 마음껏 웃고 떠들었다”며 즐거워했다. 강한 바닷바람에 평소보다 세 클럽을 더 잡고도 어림없이 짧은 샷이 나오거나 바나나처럼 공이 휘기도 했다. 섭씨 30도 가까운 찜통더위에 시달려도, 때로는 세찬 스콜이 회원들의 얼굴을 때려도 표정만큼은 다들 밝았다.
광주 운암한국병원장인 내과 전문의 윤재영 회원(55)은 “내 닉네임을 늙은이라는 의미의 ‘옹(翁)’이라고 지었다. ‘옹 형’이라고 부르는 후배들 속에 세월을 잊고 지냈다. 앞으로 6개월 동안은 엔도르핀이 샘솟을 것 같다”더니 트위스트 춤 실력까지 보였다. 퍼터에 중독돼도 행복하다
기자가 2009년 한국을 방문한 퍼터 명장 스코티 카메론 씨(미국)에게 받은 명함의 뒷면은 백지였다. 그는 메모 공간이 많은 이 명함을 들고 수시로 대회 현장을 찾아서 선수와 퍼터에 대한 의견을 나눠 제작에 반영한다고 했다. 선수들은 스튜디오라고 불리는 그의 작업실을 찾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탄생한 맞춤형 퍼터는 뛰어난 성능뿐 아니라 독창적인 디자인을 갖춘 예술 작품처럼 수집가의 표적이 됐다. 아마추어 주말 골퍼 역시 이런 희소성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특히 카메론 씨가 직접 펀치로 쳐서 각인한 핸드 스탬프와 일반 양산 모델로는 출시되지 않는 모델들은 세상에 하나뿐인 퍼터로 각광을 받았다. 미국프로골프(PGA)투어 프로 중 60% 이상이 카메론 씨가 제작한 퍼터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윤재영 회원은 “일본의 오타쿠와 비슷한 성향을 지녔다. 스코티 카메론 퍼터를 10개 이상 갖고 있는 회원도 많다. 나도 5개 있다”고 말했다. 한 회원은 “우리 집 진열장에 카메론 퍼터 10개가 있는데 그 가격을 합하면 1억 원이 넘는다”고 덧붙였다. 사이판의 느린 그린에 적합한 가벼운 퍼터를 따로 갖고 왔다는 회원도 있었다.
스코티 카메론 퍼터는 일반 매장에서 판매하는 양산형 제품과 수제 주문 생산 방식에 따른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나뉜다. 후자의 경우 가격은 500만 원이 기본이며 1000만 원이 훌쩍 넘는 제품도 많다.
사이판 행사에 참가한 회원의 캐디백에는 모두 스코티 카메론 퍼터가 꽂혀 있었다. 그 총액은 최소 20억 원이 넘을 것으로 추산됐다. 부산의 모 대학 교수인 한 회원은 “돌아가신 사촌 형이 유품으로 퍼터를 남겨 주셨다. 타구음을 극대화화기 위해 퍼터 헤드에 빈 공간이 있다. 값을 매길 수 없는 퍼터”라고 말했다. 동호회 회원들이 한국의 핵심 우수고객으로 떠오르면서 카메론 씨는 회원들에게 직접 디자인한 퍼터 커버를 선물하고 주요 행사에 우선적으로 초대하기도 했다. 그럼 명품 퍼터의 효과는 어떨까. 3퍼트를 한 회원에게 어찌 된 영문이냐고 물었다. “퍼터 값도 못 한다는 말을 자주 들어요. 골프에서는 드라이버는 쇼고 퍼트는 돈이라는데 퍼터 사는 데만 돈을 쓴 것 같아요. 연습만이 왕도죠. 허허∼.”
하지만 최근 카메론 씨는 일본의 제국주의를 상징하는 욱일기 문양이 새겨진 골프 용품을 제작해 파문을 일으켰다. 클럽 카메론 동호회 웹사이트를 통해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논란이 더욱 거세졌다. 한 회원은 “유대인에게 나치 문양이 새겨진 골프 용품을 팔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비난했다. 동호회는 카메론 씨의 그릇된 역사의식을 지적하며 시정을 촉구하는 e메일을 보냈다. 고쳐지지 않을 경우 동호회 이름까지도 바꿀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회원들의 노력이 통한 것일까. 카메론 씨는 17일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욱일기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고의로 그런 것은 아니며 더는 이 제품을 유통시키지 않을 것”이라는 사과문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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