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대한민국 폭탄주 30년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19일 03시 0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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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인은 왜 끊임없이 폭탄주를 만들어 마시고 있을까. 과도한 음주를 조장한다는 비난을 받고 숱한 사고를 낳았으면서도 폭탄주는 왜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폭탄주가 우리나라 음주문화에 비집고 들어온 지 30년이 넘었다. 술이 그다지 세지 못한 상당수 사람이 ‘불청객’으로 비난했지만 폭탄주는 어느덧 한국 사회 음주문화의 주인공 자리를 차지해버렸다. 양주와 맥주를 혼합한 ‘양폭’으로 시작된 폭탄주 문화는 ‘소폭’(소주 폭탄주)으로 이어지면서 저변을 확대했다. 이어 세대와 유행을 달리하면서 맥주 대신 에너지음료를 섞은 ‘에너지 폭탄’, 탄산수를 섞은 ‘페리에주’ 등으로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폭탄주가 처음 등장했다고 알려진 1980년대 초만 해도 폭탄주는 일부 계층이 비밀스럽게 향유하는 ‘그들만의 문화’였다. 하지만 2013년 현재, 폭탄주는 애주가 대부분이 공유하는 ‘우리들의 문화’가 됐다. 술은 ‘사회의 음식’이라 한다. 그 사회의 성격을 나타내는 측정기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술의 사회학’을 쓴 박재환 부산대 명예교수(사회학)는 “술은 사회적 사실이고, 술에 대한 분석은 사회의 실존적 상황을 드러내는 출발점”이라고 했다. 》  
▼ 박희태, 군인들 양주만 콸콸 붓길래 맥주 탄게 시초 ▼

2009년 LED TV 개발 당시 삼성 ‘29.9mm 초정밀주’ 돌려
올림픽 선전 기원 ‘성화봉송주’ 공동체 지향 확인하는 자리로


#1. 폭탄주는 집단의 음식

폭탄주는 부서 회식처럼 공동체 의식을 다지는 자리에서 자주 등장한다. 소주잔을 맥주잔 위에 세운 뒤 한쪽 끝에서 도미노처럼 줄줄이
 쓰러뜨리는 부서장의 ‘도미노 폭탄주’ 개인기에 환호성이 터지지만 다음 날 아침엔 무뚝뚝한 표정에 피곤한 상태로 하루를 시작하곤 
한다. 문권모 기자 mikemoon@donga.com
폭탄주는 부서 회식처럼 공동체 의식을 다지는 자리에서 자주 등장한다. 소주잔을 맥주잔 위에 세운 뒤 한쪽 끝에서 도미노처럼 줄줄이 쓰러뜨리는 부서장의 ‘도미노 폭탄주’ 개인기에 환호성이 터지지만 다음 날 아침엔 무뚝뚝한 표정에 피곤한 상태로 하루를 시작하곤 한다. 문권모 기자 mikemoon@donga.com
※ 다이너마이트주=그룹의 모태가 한국화약인 한화 직원들은 1980년대부터 다이너마이트주를 마셨다. 양주는 뇌관(雷管), 맥주는 장약(裝藥)에 비유했다. 지금은 거의 명맥이 끊겼지만 한때는 사내 공식 행사에 다이너마이트주가 빠지지 않았다.

혼자서 폭탄주를 만들어 마시는 사람은 드물다. 폭탄주는 여러 명이 모여서 즐기는 집단의 술이다. 탄생할 때부터 집단의 문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폭탄주의 유래 중 하나는 박희태 전 국회의장 제조설이다. 그가 1983년 춘천지검장으로 일하던 당시 지역 기관장회의에서 처음 만들었다는 설이다. 군사정부 시절인 당시 춘천 기관장 회의에선 2군단장이 술자리를 주도했다. 군단장은 저녁 자리마다 위스키를 맥주잔에 가득 따라 돌렸다. 참석자 중 나이 많은 교육감은 기관장 회의만 다녀오면 다음 날 출근도 못할 정도가 됐다. 다들 “군인들 따라 마시다가 다 죽겠다”고 투덜거렸다.

마침 군단장이 교체되는 시점이 왔다. 이때 박 전 의장이 군을 제외한 멤버들에게 “위스키 반, 맥주 반을 섞어 ‘강원도민주’로 이름 붙이고, 새 군단장이 오면 여기선 이렇게들 마신다고 하자”고 제안한 것이 폭탄주의 시초가 됐다는 주장이다.

물론 이미 6·25전쟁 당시 미군들이 마셨다는 증언이 있는 걸 보면 이 땅에 폭탄주가 ‘출격’을 시작한 시기는 훨씬 오래전일 수 있다. 하지만 ‘맹폭’이 시작된 시기, 즉 폭탄주가 음주문화의 한 형태로 확산된 것은 1980년대 초부터라는 게 정설이다.

폭탄주는 집단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거울과 같은 역할을 한다. 경남 창원시에 있는 LG전자 냉장고 공장(제1공장)과 세탁기 공장(제2공장)에선 서로 다른 폭탄주가 이어져 내려온다.

냉장고 쪽 사람들은 ‘칸칸이주’를 마신다. 소주잔 2개를 준비해 그중 하나에만 얼음을 넣은 뒤 두 잔에 모두 소주를 채워 양손에 하나씩 쥐고 동시에 입에 대고 마시는 게 정석이다. 한쪽은 냉장실, 한쪽은 냉동실이라 해서 칸칸이주다. 이웃한 세탁기 공장엔 ‘통돌이주’가 있다. 양손에 소주병과 맥주병을 쥐고 동시에 따른다. 소주와 맥주가 섞이는 모습이 ‘통돌이 세탁기’에서 물과 세제가 섞이는 것을 연상시킨다고 해 통돌이주라는 이름이 붙었다.

폭탄주는 법조계, 관계, 언론, 건설업계 등 특정 집단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며 강한 생명력을 길렀다. 제갈정 인제대학원대 교수 등의 연구에 따르면 직장인의 음주는 개인의 성향보다 조직 분위기에 더 많은 영향을 받는다. 허시명 막걸리학교 교장은 “공동체의 성과를 중시하는 조직이나 남성적 분위기가 강한 건설업계에서 폭탄주에 대한 애착이 특히 강하다”고 말했다.

#2. 공동체정신을 일깨우는 제의(祭儀)

※조폭주
=폭탄주 제조법이라기보다는 마시는 방법 중 하나. 폭탄주 제조자가 “우리는”을 선창하면 모든 참석자가 “조직이다” 라고 외친다. ‘KKSS(까라면 까고 시키면 시키는 대로)’나 ‘빠삐따용(빠지거나 삐치거나 따지면 용서하지 않는다)’도 있다.

특정 집단이 공유하는 폭탄주 문화에는 공동체의 지향점이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무엇인가를 만드는 제조업체나 연구소에서 두드러진다. 삼성전자 TV사업부에서는 ‘LED주’, ‘보르도주’ 등 TV 제품 브랜드를 딴 폭탄주가 유행했다.

2009년 두께가 29.9mm에 불과한 발광다이오드(LED) TV 개발과 함께 탄생한 LED주는 먼저 양주나 소주를 0.9mm 따르고 맥주를 29mm 부어 만든다. 제조 과정에서 소주나 맥주의 ‘정량’보다 많거나 적으면 벌주(罰酒)를 받아야 한다.

체육인들 사이에선 ‘성화봉송주’가 크게 유행했다. 빈 맥주병을 거꾸로 들어 손잡이로 쓰고 그 위에 빈 폭탄주 잔을 여러 개 겹쳐 쌓고 마지막 잔에 맥주와 소주를 섞는다. 성화대 정도로 쌓으면 생각보다 무거운 데다 중심을 잡기 힘들다. 이런 자리에선 으레 “올림픽에서 한국 선수들의 선전(善戰)을 진심으로 기원하려면 이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는 말이 나온다.

사회학자들은 술을 마시는 것은 한배를 탄 공동운명체임을 확인하는 행위라고 해석한다. 집단의 술자리에서는 잊혀졌던 공동체의 의미가 복원된다. 너와 나를 넘어서는 초월적 존재로서 공동체를 인식하는 과정은 제사에 비유되기도 한다.   
▼ 상명하복-획일문화 악명… 억지 건배사 금지한 기업도 ▼

‘병권자’에 예외 없이 복종… 위계질서 강한 조직서 확산
“똑같이 마시니 좋지 않으냐” ‘평등주’로 예찬하는 시각도


대한민국 폭탄주 30년
윤명희 서강대 강사(사회학)는 ‘알코올 연줄의 한국사회’라는 글에서 “모든 사회는 분리와 단절을 극복하고 공동체를 복원하기 위한 나름대로의 ‘음주 토템’을 갖는다”고 했다. 이를테면 LED주가 등장하는 삼성전자의 술자리는 경쟁 회사보다 슬림한 TV를 만들기 위해 숱한 야근을 감수해야 하는 조직원들이 공동체의 목표에 대한 서로의 의지를 재확인하려는 일종의 의식인 셈이다.

#3. 노동과 술이 분리되지 않은 술자리

※보일러메이커(boiler maker)
=1900년대 초반 미국 부두, 벌목장, 광산의 노동자들이 고된 노역의 고통을 잊으려고 맥주에 독한 양주를 섞어 마신 술. 이 술이 미군에 전해졌고, 1980년대 미국에 특수전 훈련을 받으러 간 신(新)군부 인사들이 한국에 퍼뜨린 게 폭탄주가 됐다는 설이 있다.

근대 이전의 작업장에는 항상 술이 있었다. 농사일을 하면서 중간 중간 새참과 농주를 먹고 마시는 풍습처럼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는 근로자들은 육체노동의 피로를 술로 풀었다.

하지만 대량생산이 시작된 19세기 말 작업장의 효율성이 지상과제로 떠오르면서 술과 노동은 분리됐다. 지금은 작업장 주변의 선술집이나 사무실 내의 커피 브레이크에서 술과 노동이 분리되기 전의 원형을 발견할 수 있을 뿐이다.

폭탄주는 노동과 술이 분리되기 이전의 원형을 지니고 있다. 정헌배 중앙대 경영학과 교수는 “폭탄주가 등장하는 회식이나 접대 자리는 노동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런 자리에서 마시는 술은 효율적이어야 한다. 잔뜩 취해 피로를 잊거나, 허물을 벗고 친교를 맺는 결과물에 빠른 시간 내에 도달하는 게 최선”이라고 말했다.

폭탄주 문화가 싹터 빠르게 확산된 1980년대 초부터 1990년대 외환위기 전까지 한국 경제는 과도한 노동과 고속성장의 연관관계를 학습했다. ‘열심히 일하면 성공한다’는 믿음이 자라났다.

일부 애주가 리더는 ‘농업적 근면성’으로 일하는 데 따른 스트레스와 피로를 폭탄주로 달래며, 이를 경영학석사를 뜻하는 MBA에 빗대 알코올을 통한 관리(Management by Alcohol)라 부르기도 했다. ‘술의 사회학’의 공동 저자인 고영삼 박사는 이런 현상을 ‘조직의 재생산 메커니즘’이라 불렀다.

#4. 폭탄주는 권력의 술이다

※충성주
=1990년대 말부터 유행한 폭탄주. 맥주잔 위에 젓가락을 놓고, 그 위에 양주잔을 올린다. 술 마실 차례가 되면 머리로 술상을 ‘쿵’ 박아 양주잔을 떨어뜨려 만든다. 조직폭력배들은 부하의 충성도를 시험하기 위해 단단한 대리석 술상에서 충성주를 강요하기도 했다.

조직의 술인 폭탄주가 테이블에 오르는 순간 술자리엔 권력관계가 생겨난다. 한순간에 폭탄주를 제조하거나 분위기를 관장하는 ‘병권자(甁權者·폭탄주 제조 권한을 가진 사람)’와 그의 술을 받아 마셔야 하는 자로 갈린다. 이 시점부터 술 마시는 양과 방법은 병권자가 정한다. 나머지 사람들의 개별적인 대화는 ‘지방방송’으로 간주해 금지된다.

허시명 교장은 “폭탄주도 일종의 칵테일이지만 상대방 배려라는 관점에선 근본적으로 다르다”며 “손님이 선택하거나 손님의 기분과 상태를 고려해 바텐더가 골라주는 칵테일과 달리 폭탄주는 제조자가 술의 형태와 양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형태를 띤다”고 분석했다.

“폭탄주 술자리는 술값을 내는 사람이 진작부터 정해져 있는 때가 많죠. 연장자나 상급자, 접대하러 나온 ‘을(乙)’같이 권력관계의 상위나 하위에 있는 사람이 돈을 냅니다. 위계질서가 엄격하게 형성된 사람들끼리 모이는 술자리에서는 폭탄주가 등장할 가능성이 크다는 의미죠.”

폭탄주 술자리는 집단의 우두머리가 관장하는 중앙집중형 구조다. 몇 년 전부터 삼성그룹에는 한 사람씩 일어나 돌아가며 건배사를 한 뒤 술을 마시는 풍습이 널리 퍼졌다. 한 사람씩 무대의 주인공이 되고, 다른 사람은 청중이 되는 건배사 문화는 모두가 참여하는 중앙집중형 술자리를 만드는 완벽한 무대장치다(획일적 집단문화를 없애고 개인의 개성을 존중한다는 차원에서 삼성은 지난해 건배사를 금지했다).

술을 거의 입에 대지 않는 박근혜 대통령도 국회의원 시절 폭탄주 자리에서 제조권을 쥐며 분위기를 주도하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강창희 국회의장이 조폭주를 만들어 돌리는 것을 보고는 “제 앞에서는 조폭 건배를 함부로 하시면 안 됩니다”라고 말한 뒤 자신의 뺨을 만지며 “조폭 건배를 하려면 이 정도(2006년 서울시장 선거 유세장에서 테러를 당해 생긴 흉터)는 있어야죠”라고 농담을 던져 좌중을 휘어잡았다고 한다.

지난해 한 TV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해서는 “제가 (폭탄주를) 마시는 것보다는 제조하는 걸 좋아한다”며 “제가 이공계 출신이라 정확하다. 비율을 잘 맞추고, 술 따르는 각도 중요하다. 손에서 적외선이 나와 잔을 잡는 것도 (폭탄주의 맛이) 영향을 받는다”고 했다.

폭탄주에는 평등에 대한 열망도 반영됐다. 과거 군대에서는 하급자가 상급자와 술을 마시려면 차상급자와 먼저 마셔야 하는 ‘결재주’가 유행이었다. 3명 중 막내가 최상급자와 술을 한 잔 마시려면 자신은 두 잔을 마셔야 했다. 하지만 군에서 폭탄주 문화를 받아들인 뒤에는 위아래가 같은 양을 마시는 ‘평등주’로 문화가 바뀌었다.

술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쓴 남태우 중앙대 문헌정보학과 교수는 “독주에 대한 부담 때문에 술을 섞는 타협점을 찾은 것처럼 폭탄주는 술자리의 권력 이동을 이끌었다”고 풀이했다. 폭탄주 전문가로 이름난 심재혁 태광산업 부회장도 2002년 ‘폭탄주에 관한 소고(小考)’라는 글에서 “초대자나 참석자나 같은 양을 마시는 아주 공평하고 민주적인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5. 텐텐주(가득 따른 폭탄주)에서 반폭(반만 채운 폭탄주)으로

※심통주, 바크만주
=폭탄주의 대표주자로 이름을 날린 심재륜 전 부산고검장과 박만전 성남지청장(현 방송통신심의위원장)이 조직에 남긴 폭탄주 이름. 제조법은 간단하다. 테두리에 표면장력이 생길 정도로 양주잔에 가득 양주를 채우고, 맥주도 가득 따르는 이른바 ‘10부 폭탄주’다.

1990년대 민주화 바람을 타며 사회 분위기가 바뀌었다. 덩달아 폭탄주의 강도도 점점 약해졌다. 폭탄주와 인연이 깊은 집단인 검찰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초 검찰에선 상명하복(上命下服)과 연대의식 문화 때문에 폭탄주가 널리 퍼졌다. 검사 10명이 모이면 기본 100잔의 폭탄주가 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바쁜 탓에 빨리 마시고 빨리 취하자며 폭탄주를 돌렸다. 이들과 술을 마신 출입기자들은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뻗기 일쑤였다. ‘화합주’로 시작된 검찰의 폭탄주는 ‘심통주’ ‘바크만주’ ‘뿅주’ ‘드라큘라주’ ‘회오리주’ ‘타이타닉주’ 등으로 진화했다.

사고도 많았다. 진형구 전 대검 공안부장이 대낮에 폭탄주를 마시고 “우리가 조폐공사 파업을 유도했다”는 발언을 해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은 것이 대표적이다.

하지만 시대가 변하며 검찰도 바뀌었다. 김성호 전 법무부 장관은 폭탄주 제조용 미니 술잔 세트를 맞춰 지인들에게 나눠준 것으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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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데 빨리 먹자는 ‘효율’에서 퍼포먼스 위주 ‘오락’으로 진화
탄산수 섞은 ‘물폭탄’ 등장하고… 싸이-류현진도 폭탄 전도사로

독한 술로 빨리 취하자는 폭탄주의 본질에서 벗어나 양주에 탄산수를 탄 폭탄주까지 등장하며 한국 특유의 대중문화로 진화했다. 동아일보DB
독한 술로 빨리 취하자는 폭탄주의 본질에서 벗어나 양주에 탄산수를 탄 폭탄주까지 등장하며 한국 특유의 대중문화로 진화했다. 동아일보DB
최근에는 검찰 간부들도 예전만큼 술을 즐기지 않아 탄산수에 양주를 넣어 마시는 폭탄주가 인기다. 기자 사회나 관가도 마찬가지다. 세종시로 이전한 한 부처의 공무원은 회식 분위기를 띄우려고 주스를 탄 폭탄주를 제조하려다 ‘억지로 흥을 내고 싶지 않다’는 동료들의 반응에 머쓱해져 그만뒀다고 한다.

#6. 한국인은 왜 여전히 폭탄주를 마시는가

※페리에주
=2010년경부터 유행한 폭탄주로 페리에 등 탄산수에 양주나 소주를 타 마신다. 술을 물에 탄다는 점에서 ‘섞는다’는 행위만 남았을 뿐 고(高)알코올, 효율적으로 빨리 취하자는 경제성 등 폭탄주의 본질은 사라졌다.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씨는 자신의 글에서 “한국인이 폭탄주를 먹는 것은 빨리 취하고 싶어서”라며 “서로 할 얘기가 없으니 멀뚱멀뚱 마주보기가 두려운 것이고, 그 황당한 상황을 견디기가 너무 힘들어 폭탄주를 마시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지금의 폭탄주는 ‘고알코올 술을 빨리 마시고 빨리 취한다’는 원칙에서 벗어나는 추세를 보인다. 효율성과 경제성의 원칙을 중시하는 폭탄주에 재미 요소가 들어가며 본질이 바뀌었다는 해석이다. 동아일보가 취업포털 잡코리아를 통해 일반인 23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 중 가장 많은 28.9%가 폭탄주의 장점으로 ‘재미’를 꼽았다. ‘빨리 취하고 술자리가 빨리 끝나니 좋다’는 답변(25.6%)은 근소한 차이지만 2위에 그쳤다.

대표적인 사례가 몇 년 전부터 유행한 ‘페리에주’, 2005년 ‘황우석 논문조작 사태’ 때 유행한 ‘줄기세포주’(줄기세포가 실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양주나 소주 대신 물을 넣어 만든 뇌관 없는 폭탄주)다. 취하는 것보다는 폭탄주 만드는 과정의 오락을 더 중시하는 게 공통점이다.

하이트진로는 몇 년 전 미리 제조한 폭탄주를 병에 넣어 파는 것을 내부적으로 검토했다. 하지만 폭탄주는 직접 만드는 과정에 의미가 있는 ‘DIY(Do It Yourself) 상품’이라는 생각에 결국 계획을 접었다. 한 맥주회사도 ‘한국인은 독한 맥주를 좋아한다’는 생각에 도수가 높은 맥주를 상품화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백세주’를 소주에 타 마시는 주당이 많아지자 국순당은 아예 ‘오십세주’를 내놓았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전보다는 못하지만 ‘빨리 취하자’는 의도도 여전히 남아 있다. 20대 사이에서 에너지드링크나 이온음료를 넣어 흡수 속도를 높인 폭탄주가 빠르게 퍼지는 현상이 이를 증명한다.

#7. 폭탄주는 한국인의 술이다

※혼돈주(混沌酒)
=18세기 선비들이 마셨다는 폭탄주의 조상. 막걸리에 소주를 조심스레 따르면 위로 맑게 떠오른다. 좋은 일이 생기면 이 술을 만들어 혼돈주라 부르며 즐겼다.

1990년대 초부터 폭탄주가 일반 대중에 확산된 데는 배타적 권력집단에 대한 선망이 깔려 있다는 분석이 제기된다. 1986년 국회 국방위 국회의원과 육군참모총장 등의 술자리가 폭행사건으로 이어진 것이 화제가 되면서 이 자리에서 마셨다는 폭탄주가 대중의 관심을 끌었다. 1980년대 후반 시작된 호황기에 흥청망청 술을 먹는 접대 문화가 뿌리를 내렸다. 1990년 양주 수입 개방조치는 이런 세태에 불을 댕겼다.

당시 소주 폭탄주가 아닌 양주 폭탄주부터 시작된 것은 당연했다. 1980년대 상류층 술 문화의 장(場)은 맥주를 파는 비어홀에서 양주가 주류인 룸살롱으로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이때 두 술 문화가 융합되면서 폭탄주가 자리를 잡았다. 비어홀이나 룸살롱에는 서민의 술인 소주가 없었다. 자연히 양폭이 먼저였다.

경제가 고속성장하면서 빈부 격차는 심해졌다. 경쟁에서 밀려난 계층은 검사, 기자, 군간부 등 이른바 ‘끗발 있는 집단’을 욕하면서도 그들의 배타적인 술 문화를 따라 배웠다.

특히 소폭의 등장은 폭탄주의 대중화에 결정적 기여를 했다. 소폭은 1996년 김영삼 전 대통령이 “경제를 살리려면 (수입) 양주를 적게 먹어야 한다”고 언급한 게 알려지며 본격적으로 확산됐다는 해석이 많다. 허시명 교장은 “이 시기 언론과 검찰 등 특정 집단이 끊임없이 폭탄주 이슈를 양산한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지목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자 직장인은 물론이고 20대 대학생들의 술자리에도 소폭이 자연스레 자리 잡았다. 소폭은 양폭에 비해 값이 쌌다. 도수가 낮아 독한 술을 피하려는 웰빙 유행에도 맞았다. 양주+맥주의 공식이 깨지자 별의별 폭탄주가 등장했다. 대학생들은 폭탄주를 오락으로 받아들였다. 본보 설문조사에서 ‘폭탄주가 재미있어서 마신다’는 비율은 직장인이 18.7%인 반면 대학생은 46.5%나 됐다. 박재환 교수는 “원래 (싸게 빨리 취하는) 경제적인 술인 폭탄주가 한국에 처음 소개될 때는 높은 양주 가격 등으로 인해 상류층의 우월한 문화로 변형됐다”며 “이후 대중화 과정을 거치며 경제성과 재미의 가치로 분화되는 궤적을 그렸다”고 분석했다.

해외에도 폭탄주가 있지만 한국인만큼 열정적으로 술을 섞어 마시는 민족은 없다. 그래서 폭탄주는 이제 한국 특유의 문화로 대접 받기에 이르렀다. ‘국제 가수’ 싸이는 유튜브 등을 통해 세계의 팬들에게, 데뷔 첫해 미국 프로야구를 호령한 LA 다저스의 류현진 선수는 동료들에게 폭탄주를 전파했다.

폭탄주가 이런 지위에까지 올랐지만 사실 폭탄주는 원형(原形)이 없는 술이다. 섞는 순간 원래의 술의 존재 형태와 의미는 무시된다. 술이 아니라 술 마시는 방법이라 하는 게 더 정확하다는 의견도 있다. 정헌배 교수는 “블렌디드 위스키는 여러 오크통에서 숙성한 술을 40개 정도 섞은 술이다. 12년, 17년, 25년, 30년산(産)이라는 이름은 가장 ‘젊은’ 원액의 나이를 기준으로 한다”며 “여기에 3주 숙성한 맥주를 섞으면 30년산 양주가 21일산 양주가 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폭탄주가 ‘제대로 술을 즐기는 문화가 없는 천박한 현실’을 초래했다는 비난도 많다. 하지만 술은 우리 자신의 모습을 비추는 ‘사회적 거울’이다. 30년을 대한민국과 함께한 폭탄주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고속 성장과 그로 인한 크고 작은 아픔과 기쁨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우리의 자화상이다.

김용석·길진균·최예나 기자 nex@donga.com
#폭탄주#한국 술문화#음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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