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태숙 “지옥에 온 당신, 무엇을 할것인가”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10월 22일 03시 00분


11월 2일 막 올리는 ‘단테의 신곡’ 한태숙 연출의 출사표

한태숙 연출은 “연옥이 더 지옥 같다. 이루어질 리없는 작은 희망을 안고 지내야 하는 곳, 지옥보다 더 고통스럽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한태숙 연출은 “연옥이 더 지옥 같다. 이루어질 리없는 작은 희망을 안고 지내야 하는 곳, 지옥보다 더 고통스럽지 않을까”라고 말했다. 김재명 기자 base@donga.com
등정 못한 봉우리처럼 남는 책들이 있다.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은 그중 하나다. 수많은 이들이 읽지 못했으면서도 제목을 안다. 2년 전 국립극장 국가브랜드공연 제안을 받은 한태숙 연출(63·극단 물리 대표)은 이 봉우리를 떠올렸다. 그리고 내내 애를 끓였다. 한 연출과 고연옥 작가, 베르길리우스 역의 정동환은 연극 ‘단테의 신곡’ 작업에 대해 이구동성 “지옥과 다름없었다”고 말했다.

18일 오후 찾아간 국립극장 리허설 현장에는 작은 웃음기 하나 없었다. 동전 하나 떨어지는 소리에도 누군가 대뜸 비명을 지르며 쓰러질 듯했다. 잔인한 말이지만, 피부로 전해지는 그들의 진저리 닮은 몰입이 공연에 대한 기대를 부풀렸다. 간명하게 졸여낸 대사에는 원작의 무게와 품위가 온전했다. 이야기 굽이마다 창과 현대음악이 어색함 없이 번갈아 스몄다. 연기의 밀도는 당연지사였다. 1막 ‘지옥’ 연습 뒤 막간. 로비에서 한 연출을 만났다.

―기진맥진한 가운데 집중을 놓지 않는 열기가 느껴졌다. 권투경기 막바지 비슷한.

“지옥에 빠지지 않고는 빚어낼 수 없는 이야기다. 감각에 기대지 않은 채 관객을 이끌고 심연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결국 만드는 사람들의 절실함, 절박함뿐이다.”

―많은 걸 보여주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원작인데…. 오히려 많이 덜어낸 느낌이다.

“지난해 봄 대본작업 착수할 때는 장자(壯子)를 끌어들일 구상도 했다. 과욕이었다. 지금이 8번째 수정본이다. 머리가 다 셌다.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소모’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작업이었다. 다시는 못할 거다.”

―작가 입장에서는 버리기 싫은 단어가 많았을 텐데….

“작가에게 단어는 자식이다. 버리면 가슴 저며 한다. 나이로 눌렀다. 원작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대표성 가진 에피소드를 뽑아낸 건 작가의 힘이다. ‘포괄적이면서도 예각을 가진 인물’을 주문했으니 (고 작가가) 얼마나 골치 아팠을까. 몇 번이나 창밖으로 뛰어내리고 싶었는데 작업실이 1층이라 다행이었다고 하더라.”

―그렇게 지어낸 언어가 관객에게 얼마나 닿을 수 있을까.

“친절하게 소통하고자 했다. ‘쉽게 가자’는 아니고. 원작 뉘앙스에는 작가의 잘난 척이 도드라져 캐릭터에 접근하기 어렵다. 보편적 인물로 정리했다. 살아가다 문득 내면의 그림자와 마주치는 인물. ‘신곡’ 연구가들은 이 책을 너무 경배해 실존이 아닌 먼 풍경처럼 만들었다.”

―‘내가 설마 지옥에 가겠어?’라고 생각하던 단테는 죄인임을 인정한 뒤 지옥 출구를 찾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서 세상이 지옥을 닮아가는 것 아닐까.

“세계대전 때 ‘신곡’이 널리 읽혔다더라. 인간이 맞은 최악의 참혹한 시기에. 무조건 빨리 달리느라 좌우를 돌아보지 않는 지금의 시대는 그때에 비해 어떨까. 결국 필요한 건 자기 자신을 들여다보는 시간이다. 나는 어디로 갈까. 내게 지옥이란 건 어떤 것일까. 공연장을 나서면서 짤막한 의문 하나 품게 된다면 좋겠다.”

―5년 전 혈액암 진단을 받았다. 건강은 어떤가.

“하루 10시간 연습 때문에 의사에게 싫은 소리 많이 들었다. 마음을 바닥까지 내려보내 스스로를 학대하는 성향이 있다. 참혹함 속에 어떤 쾌락이 느껴진다. 나는 나중에 어디로 가려나. 지옥에 있을 것 같다. 사람들 마음을 홀려 뺏은 죄로. 하하.”

: : i : :

홍정의 작곡. 지현준 정동환 박정자 정은혜 김금미 김형철 출연. 11월 2∼9일. 2만∼7만 원. 02-2280-4116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한태숙#단테의 신곡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