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3일 열린 국내 최대의 패션 축제, 서울패션위크에서 여성복 쇼의 시작을 화려하게 알린 디자이너는 지춘희 씨였다. 여성을 가장 여성답고 예뻐 보이게 하는 옷을 짓는 것으로 유명한 지 씨의 ‘미스지 컬렉션’은 ‘여성을 경배하라(Celebrate the woman)’라는 주제를 내세웠다. 이번 시즌 여러 디자이너가 주조색으로 내세운 흰색과 검은색은 물론 연분홍색, 연초록색 등 파스텔 톤의 컬러는 리넨, 울, 저지 등 다양한 소재를 통해 물 만난 고기처럼 유영했다. 피날레에선 ‘시스터 액트’를 연상시키는 대규모 합창단까지 무대에 등장했다. 마치 ‘이런 게 바로 쇼’라고 외치듯, 이 관록의 디자이너는 쇼츠와 미니 드레스 등 당장 내 옷장에 구겨 넣고 싶을 법한 옷들을 런웨이 위로 쏟아냈다.
서울패션위크의 올해 테마는 ‘소통’인 듯했다. 패션위크를 이른바 ‘패피(패션 피플)’만의 잔치가 아니라 시민들이 함께 즐기는 축제로 만들겠다는 주최 측의 포부가 느껴졌다. 지드래곤 등 YG 소속 가수들이 참여한 ‘K-스타일 콘서트’, 한남동과 이태원을 잇는 패션스트리트에서 연 ‘2013 올리브 푸드 페스티벌’ 등이 그 예다. 푸짐하게 밥상을 꾸리다 보니 약간의 무리수가 느껴지긴 했지만 새로운 시도를 해 보려는 의욕만큼은 주목할 만했다.
▼ 지춘희 “여성을 경배하라”… 고태용쇼 스포티즘 넘실 ▼ 패션의 화두는 소통
올해도 쇼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이원화돼 열렸다. 서울시 주최, 이노션월드와이드 주관으로 IFC서울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행사와 한국패션디자이너연합회 주최로 여의도공원에서 열린 패션쇼는 ‘공동주최’라는 명분을 머리에 인 채 ‘따로 또 같이’를 힘겹게 외치는 듯했다.
어쨌거나 패션 축제의 주인공은 패션이다. 특히 올해부터는 젊은 디자이너들이 본격적으로 약진하는 모습을 보여 보는 재미가 늘어났다. 이들은 젊은 패션 소비자들과 함께 호흡할 수 있는 주제를 내세우며 동시대 젊은이들의 고민을 공유했다.
서울패션위크에 참가한 지 불과 몇 시즌 만에 가장 ‘핫’한 디자이너 중 한 명이 된 디자이너 계한희 씨(26)의 ‘카이(KYE)’ 쇼도 그랬다. 지난달 열린 뉴욕패션위크에서 현지 유력패션지 ‘패셔니스타’가 선정한 ‘주목받는 15대 브랜드’ 중 하나로 꼽힌 그의 컬렉션 주제는 당돌했다. ‘젊은이들의 아픈 상처를 치유한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쇼에서는 깁스를 연상시키는 벨트를 목에 맨 모델, 옷 곳곳에 밴드를 붙인 모델들이 미끄러지듯 걸어 나왔다. 책 제목 그대로 ‘아프니까 청춘’인 걸까. 흰색과 금색, 검은색을 주조색으로 내세운 패션쇼는 야구모자 등 스트리트 패션을 상징하는 패션 아이템들과 어우러져 젊은 감성을 표현했다.
남성복… ‘남성’의 부활
여의도공원과 IFC서울에서 일제히 축제 첫날 포문을 연 것은 남성복이었다. 그리고 디자이너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남성미의 부각’을 공통의 의제로 상정했다. 로커의 감성을 담은 ‘록 시크’와 스포티즘 등의 화두가 각 디자이너의 개성에 맞춰 녹아내리는 듯했다.
여의도공원의 ‘2014 봄·여름(SS) 서울컬렉션’ 특설 무대에서 열린 디자이너 고태용 씨(32)의 쇼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런웨이 양쪽으로 마련된 좌석은 일찌감치 동이 났다. 미처 자리를 잡지 못한 관객들은 맨 마지막 줄의 좌석 뒤편 좁은 공간에 두 줄로 들어섰고, 일부는 런웨이가 잘 보이지 않는 입구 근처에서 쇼를 지켜봤다.
이날 컬렉션의 콘셉트는 ‘짐(Gym·체육관)’이었다. 1980, 90년대를 연상케 하는 헤어밴드와 일명 ‘5 대 5 가르마’를 하거나, 컬러풀한 캡을 눌러쓴 모델들이 런웨이를 누볐다. 이번 쇼의 콘셉트에 대해 고 씨는 “지극히 남성적인 공간에서 벌어지는, ‘마른 남성’들의 몸 만들기에 대한 판타지를 풀어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모델들은 넉넉한 크기의 스포티한 의상을 갖춰 입었다. 의상은 체육관을 상징하는 원색의 레드·블루·화이트·그린을 주요 컬러로 사용해 활발하고 유쾌한 느낌을 줬다. 트레이닝 팬츠를 연상시키는 루스핏의 바지, 종아리까지 올라오는 삼선 배색의 스포츠 양말, 체육관 로고를 연상케 하는 캐릭터 프린팅도 돋보였다.
코오롱인더스트리 FnC부문의 ‘헤드’는 스포츠 브랜드 최초로 서울패션위크 무대에 섰다. 이 브랜드의 최범석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는 ‘H3B(HEAD BLACK BY BUMSUK)’ 라인을 새로 선보이면서 스포츠와 럭셔리의 만남을 스타일리시하게 풀어냈다. 심플한 미학을 지향하는 스칸디나비아 가구와 건축 양식을 테마로 대리석의 무늬인 마블링 패턴 등을 응용한 점이 돋보였다. 스포츠룩 하면 떠오르는 빨강 파랑 등 원색을 과감히 포기하고 고급스러운 검정, 흰색, 은색 등을 주조색으로 내건 점도 눈에 띄었다.
디자이너 권문수 씨의 브랜드 ‘문수 권’은 축구에서 영감을 받은 컬렉션을 선보였다. 권 씨는 “선수들 모두 각자 맡은 포지션에 충실하고 서로 협동해서 공동의 목표를 이루는 모습이 우리가 인생의 최종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모습과 유사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비 어 골 게터(Be a Goal Getter)!’를 슬로건으로 내건 권 씨의 쇼는 1920, 30년대 축구팀의 흑백 단체사진을 영감의 원천으로 내세우며 선수뿐 아니라 서포터, 감독, 심판, 트로피 등을 상징하는 의상들도 선보였다. 디자이너 송혜명 씨는 복싱복을 연상시키는 의상을 입은 모델들을 대거 무대 위로 등장시켰다.
미래 지향적인 테마를 담은 컬렉션도 눈에 띄었다. 김선호 씨의 ‘그라운드웨이브’는 마치 영화 ‘그래비티’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는, 우주 비행사들이 우주복 스타일의 슈트를 입고 나오는 듯한 모습의 쇼를 연출했다.
여성복… 여성을 경배하라
여의도공원에서 열린 서울컬렉션 여성복 쇼의 첫 테이프는 디자이너 홍은주 씨의 ‘엔주반’이 끊었다. 그는 현대 사회를 지배하는 디지털에 시선을 집중했다. 디지털 제품이 넘쳐 나는 시대를 모티프로 기하학적인 패턴의 의상들을 선보였다. 홍 씨 역시 주조색으로 검은색과 흰색을 내세웠다.
디자이너 이석태 씨는 ‘건축가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 돌이 되었나니…’라는 성경의 시편 구절에서 영감을 받아 콘크리트, 나사, 시멘트 등의 건축적 요소를 의상에 녹여 냈다.
불황에는 더욱 몸이라는 인간 본질에 충실해져서일까. 스포티즘은 여성복에도 어김없이 영향을 끼쳤다. ‘스티브J&요니P’ 컬렉션에서는 몸매를 살린 디자인과 레이스 디테일 등으로 풀어낸 ‘로맨틱 스포티즘’이 살아났다. ‘팝 유니버스’라는 쇼 테마가 무색하지 않게 실제 ‘팝 스타’들도 대거 패션쇼장 맨 앞줄을 차지해 눈길을 끌었다. 공효진 최강희 이하늬 장윤주 장현승 현아 씨스타 존박 강지영 등의 스타들은 패션쇼장을 찾는 대중에게 또 다른 재미를 줬다.
국내 최초의 컬렉션 디자이너인 노라노를 다룬 패션 필름 ‘한국의 코코샤넬, 노라노’의 특별 시사회가 패션위크 기간 IFC서울에서 열렸다는 사실은 아련한 감동을 줬다. 국내 패션디자이너 1세대로 꼽히는 이 85세의 노장 디자이너는 윤복희의 미니스커트와 펄시스터즈의 ‘판탈롱’을 만들며 센세이션을 일으킨 바 있다. 그리고 그의 뒤를 걷는 패션 후학들은 이제 그보다 더 큰 반란을 꿈꾼다. 이래서 패션쇼는 곧 인간의 진화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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