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 서울 서초구 반포동 국립중앙도서관에서 청각장애인 독서모임 ‘손책누리’ 회원들이 종이책의 내용을 수화로 통역한 수화영상책을 보고 있다. 성인용 책이 다양하지 않아 아동이나 청소년용 책을 볼 때도 많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손으로 눈을 가리고 책을 읽는 것과 귀를 막고 책을 읽는 것 중 어느 쪽이 더 어려울까? 당연히 전자라는 답이 많을 것이다. 그런데 질문을 바꿔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 중엔 어느 쪽이 책 읽는 게 더 힘들까라고 묻는다면? 믿기 어렵겠지만 답은 후자, 청각장애인이다.
“두 눈이 멀쩡한데 왜 책을 못 읽어?”라고 한다면 청각장애인의 사정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청각장애인은 청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비장애인처럼 글자를 소리와 연결시켜 읽는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경우가 많다. 따라서 눈은 글자를 읽지만 그 뜻을 소리와 연계해 바로 연상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일종의 2차 장애가 발생한다.
의사소통을 수화로 하는 탓에 활자에서 점점 멀어진 영향도 있다. 김상화 경기도농아인협회 사무국장은 “수화가 제1 언어인 청각장애인 입장에서는 한글 문장을 읽을 때 마치 영어를 대하는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며 “성인 청각장애인의 문장 이해도나 구사력이 비장애인 초등학생 3, 4학년 수준이라는 충격적인 연구 결과도 있다”고 말했다.
청각장애인의 이런 불편을 덜어주는 책이 바로 ‘수화영상도서’다. 종이책의 내용을 자막으로 띄워주면서 동시에 수화를 곁들인 영상 파일 형태의 책이다. 청각장애인 김유진 씨(27)는 “종이책을 볼 때의 이해도가 60∼70% 수준이라면, 같은 책도 수화영상도서로 보면 100%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수요에 비해 이 책의 보급률이 매우 낮다는 것. 우리나라의 6급 이상 청각장애인은 26만여 명. 이 중 수화영상도서가 필요한 중증 청각장애인은 10만 명 선으로 추산된다. 하지만 현재까지 만들어진 수화영상도서는 870여 종에 불과하다.
국내에선 2010년 이후에나 본격 제작된 탓도 있지만 수화영상도서 1종의 제작단가가 평균 180만 원으로 비싼 점이 가장 큰 걸림돌이다. 제작 공정이 표준화, 단순화돼 있어 제작단가가 비교적 낮은 시각장애인용 점자책이나 음성책에 비해 종이책을 수화용 대본으로 변환해야 하고 전문 수화통역사의 인건비까지 들어간다. 국내에서 이 책의 제작을 발주하는 유일한 기관인 국립중앙도서관도 올해 5억 원의 예산을 들여 280종을 만드는 게 전부다.
예산 부족은 제작되는 책의 편중 현상을 낳는다. 두께가 수백 쪽에 달하는 소설이나 인문사회과학 도서는 20∼30분 분량의 요약본밖에 못 만든다. 그 대신 얇은 어린이용 책이 늘고 있다. 청각장애인 박우주(가명·25) 씨는 “정작 내가 읽고 싶은 소설이나 역사서는 보기 힘들다”고 아쉬워했다.
수화영상도서의 원본인 종이책 판권을 가진 국내 출판사의 협조가 절실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장보성 국립중앙도서관 자료개발과 사무관은 “원본 종이책에 있는 배경그림이나 삽화 등을 수화영상책에 넣는 경우 출판사가 사용료를 턱없이 높게 부르거나 아예 사용을 거부할 때가 많다”며 “이 비용만 줄여도 수화영상책 보급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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